
한국인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질적인 문화라고 해도 우리 기질에 맞으면 전폭적으로 수용한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 신작의 흥행 여부를 점치기 위해 앞다퉈 한국에서 최초 개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선입견이나 편견보다는 작품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낼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그런 문화 현상을 진단하기에 본보기가 되는 작품이다.
조선 선비들은 매화에 환호했다. 그들이 매화를 좋아하는 매벽(梅癖)은 사군자의 하나라는 점이 가장 컸다. 여기에 맹호연의 탐매(探梅)에 대한 이야기와 임포(林逋)의 사연까지 추가되면서 그 세계가 더욱 풍부해졌다. ‘매화서옥도’는 18〜19세기에 갑자기 유행한 화목(畵目)이다.
화목의 주인공은 송대의 시인이자 은군자인 임포인데 그의 생애는 후대 풍류가들의 심상을 건드릴 만한 에피소드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서호(西湖)가 있는 항저우(杭州)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장가도 들지 않고 매화를 아내 삼고(梅妻), 학을 아들 삼아(鶴子) 2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살았다. 이름 대신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닉네임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사연이다.
그는 벼슬에 연연하는 대신 매화를 감상하면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살았는데 이 모습은 은거를 꿈꾸지만 세속을 떠날 수 없었던 수많은 선비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고봉 기대승은 병든 자신을 ‘서호의 병골(病骨)’이라 자칭했고, 희암 채팽윤은 서재 이름을 매학헌(梅鶴軒)으로, 덕산 황기로는 매학정(梅鶴亭)이라 지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시를 지을 때마다 매와 학을 언급하면서 임포에 대한 흠모의 표현도 잊지 않았다.

조선시대 임포의 팬클럽이 있었다
선비들이 문학 쪽에서 임포의 은둔정신에 공감의 군불을 때고 있을 때 그림 쪽에서는 매은(梅隱)의 이야기를 두 가지 타입으로 그렸다. 정선(鄭敾)의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가 대표적이다. ‘고산방학도’는 임포가 눈 덮인 매화밭에 학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핵심이다. 이 주제로 이징, 조세걸, 홍득구, 김홍도, 이방운, 이유신, 윤제홍 등 여러 작가가 그렸다.
‘매화서옥도’는 임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렸지만 매화꽃 핀 초옥을 더 부각했다. 그림 속 주인공에는 임포라는 먼 옛날의 3인칭 인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조희룡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래서 굳이 학을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고 둥근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선비의 방안이 더 중요했다. 조희룡이 ‘매화서옥도’에서 자신과 임포를 동일시한 배경에는 그가 매화 사랑의 끝판왕이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그는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서재에 매화 병풍을 둘러 놓고 매화 차를 마시면서 매화 벼루와 매화 먹으로 매화 시를 지었다. 자신이 사는 곳의 편액은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지었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의 호가 ‘우봉(又峰)’이란 것만 알고 ‘매화두타(梅花頭陀)’라는 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매화에 푹 빠져 산 매화 매니아의 자세답다.
조희룡뿐만 아니라 전기, 김수철, 이한철, 안중식 등 18〜19세기에 활동했던 많은 화가가 ‘매화서옥도’를 그렸다. 이들은 마치 ‘매화서옥도’를 그려야 당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기라도 한다는 듯 너 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가 붓을 들었다. 필자는 이런 급격한 쏠림현상이 혹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현상이거나 부르르 끓었다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이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 명의 인파가 광장에 모여 대규모 거리 응원을 펼친 모습이 ‘공감’에서 우러나온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은 어떤 문화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후 이것이다 싶으면 열정적으로 자신을 쏟아붓는다. 그 열정과 쏠림의 근원에 공감이 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