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점자를 일상의 언어로! 시각장애인의 세상이 더 넓어질 수 있게”
- 휴대용 AI 점자 프린터 개발, 망고슬래브 정용수 대표

일상 곳곳에 점자 표기가 늘고 있지만 시각장애인의 삶은 여전히 불편하다. 샴푸와 린스를 구별하기 어렵고 우유를 마시려고 해도 소비기한을 확인하기 힘들다. 손님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기까지 한참이 걸린다. 벽에 설치된 화면(월패드)의 여러 버튼 가운데 ‘문열기’를 찾아 누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눌러 작동시키는 전기레인지(인덕션)도 마찬가지다. 약국에서 주는 조제약은 아침·점심·저녁 약이 똑같은 봉지에 담겨 있어 복약 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매 순간 마주하는 이런 불편은 시각장애인을 위축시킨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야 자신감도 붙는다. 이 문제를 기술로 풀어보겠다고 나선 기업이 있다. 휴대용 점자 프린터 ‘네모닉 닷’을 개발한 망고슬래브다. 망고슬래브는 2016년 삼성전자 사내벤처 프로그램 ‘씨랩(C-Lab)’에서 출발한 스핀오프 기업이다.
네모닉 닷은 점자를 몰라도 쓸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AI) 점자 출력 프린터다.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원하는 글자를 입력하면 플라스틱 라벨지에 점자가 출력된다. 음성으로 입력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존 점자 프린터는 점자를 구성하는 버튼을 직접 눌러야 해 점자를 모르면 사용할 수 없었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스페인어 등 100개 이상의 언어를 지원한다. AI 탑재로 앱에 “베트남어로 ‘설탕’을 출력해줘”라고 입력하면 프로그램이 알아서 명령을 분석하고 실행한다. 금속에도 출력할 수 있기 때문에 비나 눈을 견뎌야 하는 환경에서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네모닉 닷은 기술력과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최대 전자·IT 제품 전시회인 ‘CES 2026’에서 최고혁신상을 받았다. 최고혁신상은 CES 혁신상 수상작 가운데 각 부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제품에 주는 상이다.
망고슬래브는 제품 개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대한약사회와 손잡고 시각장애인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점자 복약지도 시스템을 구축했다. 시각장애인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약을 복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네모닉 닷은 시각장애인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국내외 공식 출시를 목표로 막바지 점검이 한창인 8월 망고슬래브 사무실에서 정용수 대표를 만났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제품을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
10년 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점착식 메모지에 원하는 글과 그림을 인쇄하는 휴대용 프린터를 개발했다. 사업을 이어오다 보니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우연히 점자를 모르면 이를 인쇄하는 것도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언어에는 규칙이 있어 구현하기 어려운 기술은 아닐 것 같았는데 정말 그런 제품이 없더라. 그래서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개발을 결심한 것은 이 제품이 정말 필요한지 확인하기 위해 시각장애인과 이들을 도와주는 분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시각장애인은 늘 먹는 약이 아니면 보호자가 없을 때 아파도 약을 먹기 어렵다고 했다. 상비약은 보통 포장상자에 점자가 있지만 대부분 종이로 만들어져 유통과정에서 눌리면 읽기 어려워진다. 아플 때 약을 먹거나 바르는 일은 기본 권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활용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뛰어들었다.
휴대용으로 만든 이유가 있나.
점자 프린팅 시장은 중간이 없다. 휴대용 아니면 인쇄 등에 사용하는 대형 프린터다. 공장에서는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수정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건물 내 화장실이나 상점 위치를 알려주는 점자가 있다고 하자. 이 위치가 달라지면 점자도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쓸 수 있는 프린터가 없으면 공장에 다시 의뢰해야 수정이 가능하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그동안 시각장애인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가끔 위아래 방향을 알려주는 버튼의 점자가 잘못 찍힌 경우가 있다. 설치하는 사람들이 휴대용 AI 점자 프린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즉석에서 출력하고 확인할 수 있다면 이런 오류를 줄일 수 있다.
금속에 점자를 출력하는 기술도 개발했다고.
비나 눈에 노출되는 공간이나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장소에는 변형이 적은 금속 점자가 필요하다. 점자가 훼손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점자의 볼록한 부분을 눌러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웃음) 다만 금속 출력 기능은 추가적으로 보완할 부분이 있어 이번 출시 제품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AI 기능까지 탑재한 이유도 궁금하다.
누구나 쉽게 쓰게 하기 위해서다. 네모닉 닷 앱에 탑재된 AI를 활용하면 기능을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 요양보호사가 미국인을 돌보면서 간장통에 ‘간장’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고 가정하자. 영어로 ‘간장’을 몰라도 “영어 점자로 간장을 찍어줘”라고 말하면 된다. 영단어를 찾아 철자를 하나하나 입력하는 것과 한국어로 말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쉽겠나.
시각장애인이 혼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제품을 기획할 때부터 시각장애인도 한 번만 배우면 혼자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실제 시각장애인과 테스트하면서 계속 개선했다. 누르는 버튼에는 모두 점자를 표기했고 기기와 연동해 쓰는 앱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게 음성 중심으로 만들었다.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뭐였나.
기술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2017년 CES에서 최고혁신상을 받은 휴대용 프린터를 개발한 경험도 있었으니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야 쉽고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를 정하는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의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짚으려면 도움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은 물론 점자를 번역하는 점역교정사 면허를 가진 약사, 맹학교 교사 등 여러 사람을 만나 필요한 부분을 들었다. 여러 번 연락해 귀찮게 했는데 감사하게도 모두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다. 시각장애인에게 ‘잘 만들었다’고 인정받았을 때 가장 짜릿했다.
올가을 출시된다고. 가격은 어떻게 되나.
10월 출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예상 판매가격은 국내 145만 원, 해외 995달러 정도다. 온라인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외국 경쟁 제품에 비해 저렴한 수준이지만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실제 사용자가 보조금을 받아 구매할 수 있는 방법도 준비하고 있다.
점자 복약지도는 언제부터 이용할 수 있나.
지난 1월 대한약사회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점자로 복약지도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점자를 모르는 약사가 운영하는 약국이라도 시각장애인이 약을 받으러 오면 복약지도를 자동으로 출력해 약봉투에 붙여주는 방식이다. 복약지도에는 약 이름과 복용법은 물론 아침·점심·저녁 약도 구분해 표시한다. 8월부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8개 약국에서 2개월 일정으로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만 시스템을 갖추는 것 외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각 약국이 점자를 출력할 기계를 갖추는 일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개인적 선의로 100만 원 이상을 부담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지 걱정이다. 이런 부분을 포함해 더 넓은 영역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공공조달이라든지 보조공학기기 지정 등을 통한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네모닉 닷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바는 무엇인가.
시각장애인이 평범하게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시작은 휴대용 AI 점자 프린터지만 최종적으로는 대부분의 공산품에 점자가 활용되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예를 들어 라면봉지나 음료캔에 상표명을 넣는 일이다. 지금 대부분의 캔음료는 상표 대신 점자로 ‘음료’ 또는 ‘탄산’이라고만 적혀 있다. 대기업은 수억 개씩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점자 금형을 만들어 상표를 찍어낼 수 있지만 규모가 작은 기업은 매일 다른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번 설비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단어를 적어 넣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은 혼자 음료를 고르기 어렵다. 라면도 마찬가지다. 더 중요한 것은 땅콩이나 새우처럼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식품 정보다. 이런 정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다. 반드시 점자로 제공돼야 한다. 시각장애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상을 하나씩 줄여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네모닉 닷을 만드는 궁극적인 이유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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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