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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김씨표류기 각본집 이해준 넥서스BOOKS

나의 첫 직장은 어느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취직이 잘된다는 말에 간호대에 덜컥 지원한 것이 화근이었다. 응급 상황을 싫어하는 내가 응급실 간호사가 되다니.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주로 산모가 찾는 병원이었기에 진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대다수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밤에는 몇 시간 내내 환자가 오지 않기도 했다. 그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일이었다. 고요한 응급실에서 깐깐한 선배 간호사와 밤을 지새운다는 건 나름대로 응급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인터넷 서핑을 즐겼지만 신입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선배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를 공부하는 척, 사진 하나 없이 글자만 띄워진 화면을 밤새워 읽었다. 선배는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드라마 각본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각본을 읽으면 드라마 속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배우의 목소리나 배경음악이 귓가에 들려오기도 했다. 글자를 읽고 있지만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기에 지루할 새가 없었다. 그렇게 각본 읽기에 취미를 붙였다. 사람들이 좀처럼 찾아 읽지 않는 각본을 나는 왜 이리도 좋아할까, 생각하던 어느 날 알게 됐다. 배우의 표정과 몸짓을 지문으로 지시하는 각본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에 가깝다. 이는 좋은 문장을 쓰는 방식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연인을 무척 그리워했다’가 설명하는 문장이라면 ‘여자는 연인이 벗어두고 간 잠옷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는 보여주는 문장이다. 각본에는 후자의 문장이 넘쳐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각본 읽기를 사랑해 마지않는 이유다.
이런 나에게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표류기 각본집’ 출간 소식은 더없이 반갑게 다가왔다. 누군가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김씨표류기’를 말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B급 코미디 냄새가 풀풀 풍기는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에 걸맞은 홍보를 하는 바람에 현대인의 고립된 삶을 표류에 빗댄 영화의 감성이 관객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포스터 제작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최소한의 정보만 담아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내려 했고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색을 사용했다고 말이다. 그의 설명을 읽고 있노라니 가까이 지내는 출판사 대표에게 파격적인 기획을 제안했을 때 돌아왔던 대답이 떠올랐다. “안 팔려.”
다행히도 이 영화는 해외에서 뒤늦게 주목받았고 덩달아 우리나라에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덕에 각본집으로 독자를 만나기에 이른 것이다.
각본집은 ‘한강의 어느 대교’에서 시작한다. 빚과 실직으로 괴로워하던 남자 김 씨는 한강에 몸을 던지지만 죽기는커녕 밤섬에 불시착한다. 그는 구조 요청을 해보기도 하고 넥타이로 목을 매보기도 한 끝에 죽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며 일단 살아보기로 한다. 남자 김 씨가 사회인에서 자연인으로 변모하던 중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이 밤섬에 도착하고 그는 난데없이 등장한 마니토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설레는 나날을 보낸다.
마니토의 정체는 밤섬이 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여자 김 씨였다. 얼굴에 있는 커다란 흉터 때문에 방 안에 숨어 사는 그녀는 망원렌즈로 바깥세상을 훔쳐보다가 남자 김 씨를 발견한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몸을 흔들거나 제 팔에 난 땀을 핥아 먹는 그를 변태 외계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은 서로를 향한 호기심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그 과정을 통해 살아갈 용기를 되찾는다.
이 각본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남자 김 씨가 버려진 ‘짜파게티’ 봉지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정말이지 얄궂게도 봉지 속에는 뜯지 않은 짜장 수프가 담겨 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그것을 입에 털어 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지만 농작물을 키워 면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누군가에게는 짜파게티가 일요일 점심에 후딱 끓여 먹는 간편식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돼준 것이다.
‘편안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운 남자. 짜파게티 봉지를 바라보고 있다. 봉지 뒷면. 조리방법과 보관방법, 각종 주의사항이 빼곡히 적힌 활자들 속에서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는 남자. 보면 - 희망소비자가격: 750원. 바라보는 남자,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글자의 일부를 가린다. 그러자 남겨지는 단어는… 희망.’
각본은 남자에게 희망이 생겼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김씨표류기’의 관객이 될지 독자가 될지는 선택의 문제다. 물론 둘 다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만 이해준 감독이 각본집 첫머리에 ‘시 같은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혀 두었으니 웃음 사이에 놓인 행간을 느껴 보고 싶다면 각본집을 먼저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각본집을 처음 접한다면 ‘디졸브’니 ‘인서트’니 하는 영화 용어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페이지 넘기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영어 원서를 읽다가 만난 모르는 단어를 문맥으로 짐작하듯 생생한 지문과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영화가 머릿속에 펼쳐질 것이다. 영화를 그림으로 옮긴 스토리보드가 상상력에 힘을 보태줄 테니 걱정은 금물이다. 버려진 짜파게티 봉지에서 희망을 찾아낸 남자 김 씨처럼 책장을 넘기다가 뜻밖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을 조금 더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문장을 말이다.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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