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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주왕산의 상징인 기암과 주방천 협곡 입구의 고찰인 대전사. 사진 주왕산국립공원(하진원

주왕산국립공원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주왕산(722.1m)을 두고 ‘눈과 마음을 놀라게 하는 산’이라고 적었다. 과장이 아니다. 숲길을 지나 주왕산의 들머리에서 기암(旗岩)의 웅장한 실루엣을 마주하는 순간, 누구라도 압도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은 1976년 우리나라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2017년 주왕산을 포함한 청송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렸다. 깎아지른 암벽과 협곡, 기암괴석이 빚어낸 독특한 풍광으로 유명하다.
주왕산의 기묘함은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 때문에 석병산(石屛山)이라 불렸고, 산마루가 큰 진지 같다고 하여 대둔산(大屯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이름인 주왕산(周王山)에도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하나는 중국의 주왕(周王)이 당나라 군사에 쫓겨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그 뒤 이 산에 은거했다는 설이다.
‘주왕’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많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는 신라에 주왕을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을 보내 공격했으나 주왕은 기암을 곡식더미처럼 위장해 적을 속였다. 전설은 산 곳곳에 이어진다. 주왕이 군사들을 숨겼다는 무장굴, 주왕의 딸인 백련 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주왕이 마일성 장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았다는 주왕굴이 있다. 주왕의 피가 흘러 산기슭에 수달래(산철쭉)가 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산의 상징인 ‘기암’의 한자도 주왕이 죽자 이를 알리기 위해 깃발을 꽂은 바위라 하여 기암괴석의 ‘기이할 기(奇)’가 아니라 ‘깃발 기(旗)’를 쓴다.

주왕산 3대 폭포 중 하나인 용추폭포. 장마가 끝난 후에 찾으면 압도적으로 시원한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사진 청송군

폭포 아래의 물웅덩이가 절구처럼 생겨 이름 붙은 절구폭포. 사진 청송군

더위 얼려버리는 태고의 협곡
여름날 주왕산이 선사하는 진정한 사치는 계곡 깊숙이 자리한 주방천 협곡(주왕계곡)을 걷는 일이다. 산행의 들머리인 대전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은 유모차를 밀고 갈 수 있을 만큼 순하다. 그러나 시원한 물소리를 길동무 삼아 숲길을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늘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절벽이 양옆으로 좁혀오고 기괴하고 웅장한 바위 틈새로 오직 바람과 물소리만 통과하는 신비한 통로가 나타난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 위를 달구던 여름철의 습한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바위 벼랑이 뜨거운 햇볕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바위 틈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온몸을 감싸안는다.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냉방장치다.
주방천 협곡은 안으로 들수록 풍경이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 주상절리가 공룡 시대를 추억하고, 미국 요세미티 화강암 절벽을 떠올리게 하는 급수대(汲水臺), 떡시루를 닮은 시루봉까지 기묘한 바위들이 이어진다. 봉우리마다 얽힌 전설이 얹어져 중국 무협지 속 비경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식생도 다양하다. 망개나무를 비롯해 박달나무, 서어나무, 왕팽나무, 신나무, 말채나무, 물푸레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울창한 그늘을 만든다.

주왕산의 은밀한 비경으로 꼽히는 절골. 큰 폭포는 없지만 바위와 물의 조화가 싱그럽다. 사진 주왕산국립공원

대전사에서 본 기암. 주왕이 죽고 깃발을 꽂은 바위라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사진 청송군

주왕산 3대 폭포에서 여름의 절정을
주왕산을 찾았다면 세 개의 폭포는 반드시 들러야 한다. 첫 번째는 용추폭포다. 협곡 깊숙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장마 뒤 수량이 풍부한 시기에 찾으면 아이맥스 영화관보다 더 웅장한 폭포 소리와 물보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상류의 용연폭포는 자연이 빚은 예술 작품이다. 주왕산 폭포 중 가장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폭포는 2단으로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물줄기가 압도적이다. 폭포 벽에는 물줄기와 자갈이 수만 년 동안 깎아 만든 ‘하식동(河蝕洞)’이 남아 있다. 거대한 바위가 물줄기를 머금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기이한 형상이다. 물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물안개는 주변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린다. 폭포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냉기를 맛볼 수 있다.
절구폭포도 빼놓을 수 없다. 협곡 안쪽의 은밀한 틈새에 숨어 있어 무심코 걷다 보면 지나치기 쉽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부드럽게 두 번 꺾여 떨어지는 물줄기와 바위에 둘러싸인 공간은 태고의 비밀정원처럼 아늑하다.
좀 더 은밀한 주왕산을 만나고 싶다면 절골로 향하면 된다. 대전사에서 차를 타고 산간도로를 따라 10㎞ 가면 닿는 절골은 찾는 이가 적어 보존이 잘 돼 있다. 웅장한 폭포는 없지만 완만하고 자연미 넘치는 계곡이 길게 이어진다. 곳곳에 나무데크가 설치돼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절골 끝에서 가메봉을 넘어 주방천 협곡을 거쳐 대전사까지 이어지는 종주 코스도 가능하지만 총 13㎞에 이르는 긴 산행이라 한여름에는 절골만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는 것이 훨씬 여유롭다.
주왕산의 여름은 뜨겁지 않다. 수직 암벽이 만든 거대한 그늘 아래서 차가운 계곡 바람을 맞고, 심장을 울리는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몸속에 쌓인 열기뿐 아니라 마음을 어지럽히던 소음까지 함께 씻겨 내려간다.

신준범 월간<산> 기자

주왕산국립공원

알고 가면 좋은 정보
추천 코스 1(주왕계곡 산책): 대전사~용추폭포~절구폭포~용연폭포~대전사. 거리 3.4㎞. 2시간 30분 소요. 전 구간이 완만한 경사로 정비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추천 코스 2(절골 산책): 절골분소~절골~대문다리~절골분소. 거리 7㎞. 3시간 소요, 비교적 완만하지만 잔잔한 계단과 오르내림이 있다.
추천 코스 3(산행): 대전사~용연폭포~금은광이삼거리~장군봉~대전사. 거리 11㎞. 5시간 소요. 장군봉에서 대전사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주왕산의 상징인 기암을 가장 장엄하고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다.
산행 길잡이: 대전사에서 용연폭포까지 이어지는 주방천 탐방로는 평탄한 흙길과 튼튼한 나무데크로 조성돼 있어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도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다. 장군봉 코스로 산행할 경우 가파른 산길이 이어지므로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주왕 전설을 따라가는 여정: 주방천 협곡 탐방 후 대전사로 돌아오는 길에 주왕의 전설이 깃든 주왕굴 방향으로 살짝 발길을 돌려보자. 계곡 산책의 단조로움을 깨워주는 흥미로운 역사 탐방길이 된다.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주왕산국립공원 입구(주왕산터미널)까지 하루 3회(08:40, 12:00, 15:30) 직행 우등버스가 운행한다. 약 4시간 30분 걸린다. 요금 3만 7400원. 주왕산터미널에서 동서울터미널행 버스가 하루 3회(08:23, 14:08, 17:40)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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