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90년 전 고려인처럼 포기는 없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잇는 배우 되고 싶어”

연극 ‘극장은 달린다!’ 출연 고려인 4세 배우 이사샤
“고려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무대가 순식간에 뒤집힌다. 배우들은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허겁지겁 주워 담는다. 미처 챙기지 못한 옷이 허공을 가른다. 누군가는 짐을 꾸리고 누군가는 옆 사람을 재촉한다. 조금 전까지 평범했던 일상은 한순간에 끊기고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다.
설명도 자막도 없다. 배우들의 다급한 몸짓과 숨소리만으로 90년 전 고려인 강제이주의 순간이 소환된다.
연극 ‘극장은 달린다!’는 1932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발한 고려극장의 역사를 무대에 옮긴 작품이다. 강제이주로 고향을 잃은 고려인들이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낯선 땅으로 향하는 여정과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도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을 따라간다. 서울문화재단이 광복절을 맞아 특별 기획한 작품이다.
무대도 유랑극단처럼 움직인다. 관객석과 무대의 높이가 같다. 바닥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관객은 세 면에 둘러앉는다. 배우와 객석 사이를 가르는 높은 무대나 장벽이 없어 작은 표정과 몸짓, 숨소리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무대 한쪽의 이동식 옷걸이는 평범한 소품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배우들이 옷걸이를 밀면 화물열차의 좁은 화물칸으로 변신한다. 세트가 공간을 설명하는 대신 배우와 소품의 움직임이 장소와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 무대에 고려인 4세 배우 이사샤(Li Aleksandra)가 선다. 이사샤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랐다. 12년 전 한국으로 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연기를 전공했다. 뒤늦게 배운 한국어도 능숙하다. 조상의 역사를 연기하는 일은 그에게 단순한 배역 이상의 의미다. 정식 공연을 앞두고 그를 만났다.
고려인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디션에 도전했다고.
처음에는 작품에 대해 잘 몰랐다. 친구가 SNS(누리소통망)로 오디션 공고를 보내줘서 알게 됐다. 그런데 ‘고려인의 이야기’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비극적인 상황을 웃음으로 풀어내면서 연기와 노래, 무용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에도 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과 잘 맞을 것 같아서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오디션에 지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고.
음악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 좋아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가 ‘음악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다. 지역 예술학원에 다니면서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이 좋았다. 거의 네 살 무렵부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무대에서 느꼈던 즐거움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나.
극단을 찾아온 ‘방문객’과 ‘아이 엄마’ 역할을 맡았다. ‘방문객’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우연히 극단의 공연을 본 뒤 연극에 관심을 갖고 오디션을 봐서 결국 단원이 되는 인물이다. ‘아이 엄마’는 처음에는 한국어를 하지 못해 러시아어로 이야기한다. 극단의 공연을 보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하면서 점차 극단 안으로 들어온다.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두 역할 모두 ‘공연을 바라보던 사람’에서 ‘공연을 함께 만드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등장인물 대부분 이름이 없다.
특정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고려인을 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름 대신 ‘아이 엄마’, ‘방문객’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 낯선 땅에서 다시 삶을 시작해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배우로서도 한 사람의 인생을 연기한다기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여러 사람의 마음을 대신 전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섰다.
가장 마음에 남는 대사를 꼽는다면?
극 중 아이 엄마가 한국어를 배우고 극단의 단원이 된 뒤에 나오는 대사 중 고려극장 단장님이 고려인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그때 내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다 같이 찾는다.”
짧은 대사지만 가장 오래 남았다.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아온 고려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아이 엄마 역할도 내 경험과 닮았다고 느꼈다. 어릴 때 한국 노래나 춤을 보면서 가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안에 담긴 감정과 분위기를 느꼈다. 언어보다 먼저 전해지는 것이 있다. 낯선 곳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문화를 지켜온 고려인의 모습이 내 뿌리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공연을 한다고.
8월 13~14일 서울 초연을 시작으로 19일 키르기스스탄, 23일 우즈베키스탄, 27일 카자흐스탄에서 순회공연을 이어간다. 고려인의 역사가 이어져온 중앙아시아에서 이 작품을 직접 보여준다는 게 정말 특별하다. 극 중에는 러시아어 대사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달라도 표정과 움직임, 음악으로 감정과 이야기는 충분히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관객들도 고려인의 역사를 잘 모르더라도 배우의 몸짓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기대한다.
연극에서 그려지는 고려인의 삶이 현실과도 비슷한가.
그렇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라면서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 익숙했다. 서로의 문화를 나누고 존중하며 살았다. 고려인의 명절이나 가족 행사 때는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고,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명절에도 함께 음식을 먹으며 축하했다.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각자의 전통을 지켜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래서 작품 속 고려인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내 경험과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뿌리와 전통을 지키는 것, 그것이 고려인의 힘이자 자부심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가 상당히 유창하다.
부모님이 한국어를 못하셔서 어릴 때는 러시아어만 쓰며 자랐다. 열 살 때 처음 한국에 여행을 왔는데 그때 받은 인상이 정말 좋았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재미있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우즈베키스탄의 한글학교와 세종학당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면서 한국어를 더 깊이 익혔다. 배우는 말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다 보니 한국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다.
고려인의 역사에 대해 자주 듣고 자랐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추운 지역으로 이주해 힘든 환경에서 생활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자세히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고려인의 역사를 따로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조상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주하고 정착해 삶을 이어왔는지 알게 됐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적은 없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전혀 없었다. 가족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자연스럽게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늘 밥과 김치를 먹었고 한국 반찬도 자주 해먹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함께 한국 음식을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나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은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산 지도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과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고려인으로서 물려받은 정신과 한국인의 정서를 함께 품은 배우로 성장하고 싶다.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어떤가?
사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고려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 때는 스스로를 당연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나를 설명하는 이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생각했던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러시아어에는 한국인과 고려인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표현을 쓴다.
배우 이사샤가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예전에 KBS 스페셜 ‘사샤의 아리랑’을 촬영하면서 강제이주를 직접 겪으신 분들을 만나 고려인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아직 고려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느꼈다. 배우로서 내가 가진 이야기를 통해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싶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우즈베키스탄계 고려인으로서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잇는 역할을 하고 싶다. 단순히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를 넘어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계기를 만드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다.
백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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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