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삼전닉스 성공의 유전자… 팔만대장경에서 반도체까지

한국 제조업의 약진이 괄목할 만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만든 반도체는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TV, 가전 등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들어간다. 반도체뿐 아니라 조선, 자동차, 배터리,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 제조업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폐허나 다름없던 나라가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이런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사실은 기적 같다. 흔히 그 비결 가운데 하나로 뛰어난 손재주를 꼽는다. 실제로 한국인의 정교한 작업 능력은 제조 현장에서 강점으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손재주와 숙련은 어느 민족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제조업의 저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그 단서를 고려시대 때 만든 팔만대장경에서 찾아보고 싶다.
현재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경판은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는 국민적 염원을 담아 1251년에 완성했다. 판각한 경판만 8만 개가 넘고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에 이른다. 제작에는 1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주목할 것은 그 방대한 작업이 한두 명의 뛰어난 각수(刻手)의 솜씨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이 제작에 참여했음에도 판식과 자형, 행간과 자간, 각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도대체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을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프로젝트 총괄을 맡은 수기(守其)대사가 초조대장경과 북송대장경, 거란대장경 등 여러 판본을 비교해 오류를 교정한 후 판각할 기준이 되는 텍스트를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됐다. 그 뒤 교정된 원문을 바탕으로 필사와 판각이 이뤄졌다. 이런 과정은 현대 제조업에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설계도와 규격을 확정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둘째,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표준화돼 있다. 팔만대장경에는 글자의 간격에 따라 줄을 긋고, 글자를 뒤집어 붙여 균형·자간·여백을 맞춰 배열한 뒤 새기는 반서각(反書刻)을 사용했다. 이때 각수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글씨로 새긴 것이 아니라 ‘정해진 판면에 정해진 글자와 간격으로 새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숙련된 전문인력의 역할도 컸다. 고려시대에는 각자(刻字)를 전문으로 하는 각수들이 있었고 이들은 상당한 문자 지식을 갖췄고 칼솜씨도 뛰어났다. 이렇게 정밀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 직능 집단이, 정해진 설계도에 따라, 표준화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 같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판각한 목판을 실제로 찍어본 후 인출을 통해 확인하고 다듬는 검수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글자의 획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불필요한 부분에 먹이 묻거나, 균형이 깨진 글자를 찾아내 오류를 수정했다. 즉 판각→인쇄→확인→수정이라는 피드백 구조가 작동했는데 이것은 현대 제조업의 생산→검사→불량 발견→공정 개선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숙련’보다 ‘숙련을 조직하는 시스템’이었다.
팔만대장경의 위대함은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손재주가 뛰어났다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결과물의 편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작체계를 구축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잘 만든다”는 ‘숙련의 개인성’이 아니라 “누가 만들어도 일정한 품질이 나오게 한다”는 ‘숙련의 표준화’가 작동한 것이다. 개인의 장인정신은 표준화, 교육, 분업, 품질관리, 조직학습을 통해 집단의 능력으로 확장됐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의 제조 문화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발견된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 고려청자, 조선의 금속활자, 조선 후기 책판, 근대 공업, 반도체까지. 물론 이들을 현대 제조업으로 직접 이어지는 하나의 기술적 계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대와 기술, 생산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밀성을 조직하고 재현하는 방식’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손재주 자체보다 손재주를 조직하는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개인의 숙련을 표준화하고, 교육과 분업을 통해 공유하며, 반복적인 검사와 개선을 통해 집단의 능력으로 전환하는 힘이다. 어쩌면 이것이 팔만대장경에서 현대의 반도체와 K-방산에 이르기까지 한국 제조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일지도 모른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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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