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부터 몸에 변화가 생겼다. 커피를 한 모금만 마셔도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오른다. 안 그래도 별 볼 일 없는 얼굴이 더욱 별 볼 일 없어져 기분이 좋지 않다. 돈가스를 먹어도, 진통제를 삼켜도, 바닷물에 몸을 담그거나 꽃밭을 걸어도 같은 일이 벌어지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도 알레르기 약 한 알이면 몇 시간 안에 부기가 가라앉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고작 40여 년을 쓴 몸도 고장이 나는데 70년을 넘게 살아낸 아빠의 몸이 망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타까운 건 아빠의 병은 내 병과는 다르게 약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요즘 그런 아빠를 돌보며 틈틈이 일한다. 협업자에게 이런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지는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내 사정이기 때문이다.
일을 줄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내 생리대를 살 때 아빠 기저귀도 사야 하고, 내 화장품을 살 때 아빠 연고도 사야 하니 돈이 배로 필요하다.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지방으로 강연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실컷 떠들고 나니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시원한 카페에 앉아 땀을 식힐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낯선 지방 소도시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업무 이메일을 확인했다. 어떤 일을 이때까지 전달해 드려도 괜찮겠냐는 내 물음에 대한 회신이 와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평소와 다르게 늦으신다, 많이 바쁘시냐, 알겠다, 일정에 반영하겠다. 그냥 일정을 앞당길 수 있냐고 담백하게 물으면 되는데 왜 감정을 섞어서 얘기하지? 갑자기 눈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메일만 읽어도 눈이 붓는구나. 가방에 든 알레르기 약을 꺼내 냉큼 삼켰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그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다시 살펴보았다. 내가 작업 기간을 너무 길게 잡았나? 아냐, 영업일 기준으로 따지면 며칠 되지도 않는데 뭘.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그날로 ‘못 박은 것’도 아니고 그날 전달해 드려도 괜찮겠냐고 ‘물어본 것’뿐이잖아? 기분 상한 티를 내고 싶었지만 일단 회신을 미뤘다. 그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던 중 언젠가 읽었던 장류진 작가의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생각났다. 이 소설은 책으로 출간되기 전 창비출판사 누리집에 무료로 공개돼 큰 인기를 얻었다. IT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덕에 직장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것이다. 분명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소설을 다시 읽어 보려 용산역에 내리자마자 서점으로 향했다.
주인공 ‘안나’는 IT 회사의 기획자다. 이 회사에서는 서로를 부를 때 ‘앤드루’니 ‘제니퍼’니 하는 영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대표와 이야기할 때는 “데이비드께서 요청하신…” 하며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조사를 붙여야 하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황당한 점은 많지만 안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개발자 ‘케빈’과의 갈등이다. 이 와중에 대표는 안나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긴다. 회사에서 운영 중인 중고거래 앱에 게시물을 도배하는 ‘거북이알’을 만나 행동을 자제시키라는 것 아닌가. 대표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었던 안나는 물건을 사려는 척 거북이알에게 접근한다. 알고 보니 거북이알은 카드 회사에 재직 중인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러나 회장과의 불화로 돈이 아닌 카드 포인트로 월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게시물을 올렸던 이유는 포인트로 구매한 물건을 되팔기 위함이었다.
거북이알의 사연을 알게 된 안나는 누구에게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낀다. 덕분에 케빈의 사정도 헤아리게 되었다. 대표는 천재 개발자 케빈을 감언이설로 꾀어 자신의 회사로 영입했다. 그러나 약속한 달콤함은 온데간데없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해내느라 고생하는 케빈이었다. 안나는 거북이알이 파는 레고를 구매해 케빈에게 건넸다. 그건 레고를 좋아하는 케빈을 위한 생일선물이었다.
‘“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케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건 아니니까.” (중략) 그 순간 케빈과 내 스마트폰 알림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봤다. 케빈과 내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알림의 정체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였다고 한다. 직장인은 월급에 웃는다. 다만 그 돈을 벌기 위해 남몰래 울기도 한다. 나에게 날이 선 이메일을 보낸 사람 역시 저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일정을 앞당겨보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나를 웃게 할 돈을 무사히 받아내기 위한 목적이 더 크기는 했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다. 참고로 안나는 울고 웃으며 번 돈으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홍콩 공연을 몇 달 전에 예매해뒀기 때문이다. 아,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게는 돌봐야 할 아빠가 있지. 꿩 대신 닭으로 홍콩이 아닌 편의점에 갔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메가톤바’를 샀다. 이것이 바로 일의 기쁨, 병원으로 가는 길이 더없이 달았다.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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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