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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유산과 예술 사이 줄타기 전통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7월 1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회식에서 소리꾼 김율희 씨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뉴시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공식행사 연출한 원일 총감독
“대고 삼타!”
경복궁 수문장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 세계유산을 담은 영상을 배경으로 종묘제례악의 ‘일무’를 재해석한 독무와 신태평무, 강강술래가 무대를 채웠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리꾼의 깊은 구음과 승무가 어우러졌다. 이윽고 부산 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새벽 여명이 영도다리를 비췄다.
7월 1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이하 위원회) 개회식. ‘하늘을 품은 지붕, 세대를 잇는 울림’을 주제로 한 특별공연은 위원회의 공식 엠블럼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정전의 지붕 곡선을 모티프로 삼았다. 전 세계의 문화를 하나의 지붕 아래 품고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장국의 다짐을 담은 것이다. ‘수문장 개문 퍼포먼스’로 막을 올린 공연은 세계유산에 대한 존중과 인류의 공존, 화합의 메시지를 하나의 서사로 풀어냈다. 공연 중간에는 위원회 공식 홍보대사 지드래곤(빅뱅)이 등장해 “유산을 지키는 일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의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며 의미를 더했다.
한국 문화유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무대를 총괄 연출한 이는 원일 감독이다. 국가무형유산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인 그는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현대음악과 종합예술을 넘나드는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음악감독, 2019년 전국체육대회 총감독, 2024~2026년 ACC 월드뮤직페스티벌 예술감독 등을 맡았다. “K-헤리티지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그를 위원회 개회에 앞서 만났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공식행사 연출을 맡은 원일 총감독은 K-헤리티지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 C영상미디어

국내 첫 세계유산위원회의 공식행사 총감독을 맡았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교육·과학을 다루는 유네스코의 국제회의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연출했던 공연과는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하나의 콘텐츠로 엮어 세계에 보여준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동시에 훨씬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실 여러 예술가와 함께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즐거움을 깨달은 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였습니다. 송승환 감독님과 연출진이 한 무대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협업의 힘을 배웠습니다. 그 뒤로 2019년 전국체육대회 총감독을 맡아 제목과 콘셉트부터 하나하나 만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종합예술 무대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구상을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 요소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가는 순간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요.
문화유산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입니다. 원형을 충실히 고증하고 훼손하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역사적 맥락과 본래의 모습을 후대에 정확하게 전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예술 무대는 창작입니다. 문화유산이 지닌 본래의 가치와 예술적 표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두 지점을 섬세하게 오가는 줄타기 같은 작업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한국’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이자 문화적으로도 세계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의 성취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문화유산에 담겨온 철학과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배흘림기둥’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전통에는 자연을 닮은 단순함과 절제의 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디자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이어져온 삶의 방식이자 철학입니다. 이번 무대를 통해 세계인들이 ‘한국은 이렇게 단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문화구나’라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한국 전통악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꼭 들어봐야 할 악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무대에서는 그런 철학을 어떻게 구현했나요.
전통악기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사운드 전반에 그 요소들이 세심하게 녹아 있습니다. 전통음악이 반드시 앞에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대 전체를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미래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전통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전통과 파격이 만나는 순간 새로운 동시대적 가치가 탄생한다고 믿습니다. 이번 무대 역시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인과 공감하는 언어를 찾는 작업이었습니다.

세계 각국 대표단이 함께하는 국제 무대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관객들에게 한국의 미학을 어떻게 전달할지도 중요한 과제였겠습니다.
문화적 간극은 분명 존재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K-컬처를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고 한국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조금만 낯설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국에 이런 아름다움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1980~1990년대 해외를 다닐 때만 해도 ‘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못할까’ 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자연과 공간, 전통의 배치에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세계도 그 가치를 발견하고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합의 문’을 상징하는 강강술래 공연의 한 장면. 사진 뉴시스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원일 감독은 국악고에 진학해 피리를 배우면서 전통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방향을 튼 결정적 계기는 사물놀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동네 친구들과 깡통을 두드리고 리코더를 불며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놀이를 즐겼다. 고등학교에서 사물놀이를 접한 순간을 그는 ‘천지개벽 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1 더하기 1이 7이 되더라고요. 엄청난 괴물이 태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폭발하던 창작의 환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그는 1993년 창작타악그룹 ‘푸리’, 2007년 한국음악앙상블 ‘바람곶’을 창단하며 전통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걸 섞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어떤 분야를 충분히 익히면 자연스럽게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도 많이 했고요. 제 머릿속에는 상상력의 ‘멜팅폿’이 있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만나고 섞이면서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합니다. 그것이 음악이 되기도 하고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사물놀이가 음악활동에 큰 전환점이 됐다고요.
저를 창작자로 이끈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장단 DNA’라는 프로젝트를 만든 적도 있는데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님께 바치는 오마주 공연이었습니다. 그만큼 제게 사물놀이의 리듬은 창작의 근원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에게는 장단 DNA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의 억양도, 판소리의 선율도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장단은 남습니다. 그 리듬이야말로 한국성을 이루는 핵심입니다.

푸리와 바람곶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제 음악 인생에서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웃음) 푸리는 전통 타악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음악을 시도한 팀이었습니다. 일본 기획사와 계약해 활동하면서 공연 시스템과 스태프 문화의 차이를 크게 느꼈습니다. ‘왜 한국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바람곶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팀입니다. 학생들도 충분히 작품을 만들고 무대를 이끄는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명상 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새로운 앙상블 작업도 했고요. 앞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협업과 창작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창작의 폭을 넓히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겠습니다.
꾸준히 책을 읽습니다. 특히 철학 공부를 많이 합니다.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줍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짚어주죠. 회의를 하다 보면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으며 분위기를 바꿉니다. 저는 그런 통찰이 철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어떤 음악을 선택하고 어떤 악기를 배치하며 어떤 장면을 구상할지, 모든 과정의 뿌리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뿌리가 단단해야 표현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감동 역시 그런 깊이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위원회 개회식 공연 영상에는 ‘디테일이 미쳤다’, ‘강강술래를 보면서 황홀해 숨이 막힌다’, ‘한이 파도로 너울 친다’는 댓글이 쏟아졌다.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해온 한국의 미학이 결국 관객들의 마음에 닿은 것이다.

이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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