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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국제통화기금(IMF)이 10월 14일 발표한 재정모니터는 한국의 재정을 바라보는 시각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IMF는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부채비율 전망을 54.4%에서 46.1%로 낮췄다. 불과 반년 만에 8.3%p 하향 조정한 것이다. 2031년 전망도 63.1%에서 51.3%로 내려갔다. 성장과 세입 여건의 개선이 배경이다. 나랏빚을 걱정하던 전망이 달라진 이유를 지출 삭감의 성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재정건전성은 국가가 필요한 일을 지속하면서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다. 빚의 규모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같은 빚이라도 경제의 크기와 세금을 걷을 기반에 따라 부담은 달라진다. 부채비율의 분자는 부채지만 분모는 명목 GDP다. 분자가 늘어도 분모가 더 빨리 커지면 비율은 낮아진다. 성장이 기업 이익과 가계 소득을 늘려서 세입을 확충하면 신규 차입의 필요도 줄어든다. 성장과 건전성은 반드시 맞바꿔야 하는 가치가 아니다.
물론 이번 전망 조정만으로 적극재정의 효과가 모두 입증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경기 회복과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의 개선은 구분해야 한다. 전망은 확정된 실적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것은 고정된 부채비율 기준이 아니라 성장률과 세입, 지출, 이자 부담이 함께 움직이는 경로다. 숫자 하나를 금과옥조로 삼는 접근으로는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정부에서 그 한계를 경험했다. 건전재정을 국정의 간판으로 내걸었지만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낮추는 감세를 추진했다. 지출에는 엄격하면서 세입을 줄이는 결정에는 관대했다. 감세가 투자를 자극해 세수를 되살릴 것이라는 기대와 당장의 지출 억제를 결합하면 나라 살림이 좋아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국가재정은 기대를 적어 넣은 장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2023년 국세수입은 본예산보다 56조 4000억 원, 2024년에는 30조 8000억 원 부족했다. 두 해의 세수 결손을 합하면 87조 2000억 원이다. 기업 실적 악화 등 경기 요인이 컸으므로 이를 전부 감세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다만 세입이 경기에 민감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재정운용이 고려해야 할 조건이다. 경기가 약해질 때 지출까지 움츠리면 경제와 세수가 함께 위축될 수 있다. 건전재정을 외치는 것과 재정이 실제로 건전해지는 것은 달랐다.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2024년 정부 연구개발 예산은 전년보다 크게 줄었다. 당장의 지출은 아낄 수 있지만 연구의 연속성과 인재 양성에는 비용을 남긴다. 연구실 문을 닫고 청년 연구자의 경력을 끊어 놓은 뒤 예산을 다시 늘린다고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미래의 소득과 세금을 만들어낼 능력을 깎아 오늘의 숫자를 관리하는 것은 절약이 아니라 자산의 훼손이다.
진정한 재정건전성은 반대 방향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과 장기 투자를 정부가 맡아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이다. 기초연구와 인재 양성, 전력망과 에너지 전환, 돌봄과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는 기업의 생산성과 국민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성장을 반도체 몇 개 기업의 성과에 가두지 않고 더 많은 산업과 지역, 노동자의 소득으로 넓혀야 과세 기반도 두꺼워진다.
이는 무조건 많이 쓰자는 주장이 아니다. IMF도 지난해 재정모니터에서 지출 총액을 늘리지 않더라도 교육과 보건, 기반시설, 연구개발로 자원을 재배분하고 집행 효율을 높이면 장기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요한 것은 지출의 규모와 함께 구성과 성과를 보는 일이다. 관행적인 보조금과 효과 없는 사업은 줄이되 성과가 늦게 나타난다는 이유로 미래 투자를 먼저 자르는 일은 피해야 한다.
재정 사업의 성적표도 바뀌어야 한다. 얼마를 삭감했는지만이 아니라 민간 투자를 얼마나 이끌었는지, 청년의 첫 일자리와 재취업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지역의 생산 기반을 얼마나 넓혔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효과를 검증하고 실패한 사업은 고쳐야 한다. 채무비율은 이런 노력의 결과를 살피는 지표여야지, 필요한 투자를 미리 막는 절대적인 명령이어서는 안 된다.
적극재정에는 책임 있는 세입정책도 따라야 한다. 성장만 하면 모든 지출이 저절로 충당된다는 낙관은 감세만 하면 세수가 늘어난다는 주장만큼 위험하다. 불필요한 비과세와 감면을 정비하고 늘어난 소득과 이익이 세입으로 연결되도록 조세체계를 갖춰야 한다. 일시적인 호황의 세수를 영구적인 지출의 재원으로 오인해서도 안 된다.
고령화와 이자 부담을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중기 재정계획을 세우고 성장률이 낮아지거나 금리가 높아져도 감당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는 방법이 언제나 지출 삭감일 수는 없다. 미래의 생산성과 노동 공급을 높이는 투자는 바로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다. 채무 관리와 성장 투자를 대립시키는 순간 재정정책은 스스로 선택지를 좁힌다.
미래세대에 남기는 것은 국채 상환 의무만이 아니다. 교육받은 사람과 축적된 기술, 안전한 사회와 생산 기반도 함께 물려준다. 빚을 조금 덜 남기겠다며 그 기반을 허무는 것이 과연 책임 있는 재정인가. 과거 정부의 경험은 성장의 토대를 약화하면서 달성하겠다는 재정건전성이 얼마나 허망한 목표인지를 보여줬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특정 부채비율이 아니라 국민이 더 잘살고 국가가 필요한 책임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재정건전성은 아껴 쓰는 구호가 아니라 성장할 힘을 키우는 정책으로 완성된다.

우석진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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