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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일러스트 이기진

냉장고가 망가졌다. 운동을 마치고 시원한 캔맥주 한잔을 마시려고 뚜껑을 땄는데 맥주가 미지근했다. 그제야 냉장고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냉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냉동칸도 마찬가지였다. 김치야 그렇다 쳐도 다른 음식은 모두 버려야 했다. 새 냉장고를 주문했지만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 이틀 동안 나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야 했다.
현대사회에서 냉장고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냉장고 없는 아이스크림 가게와 정육점, 식당과 슈퍼마켓…. 과연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냉장고는 우리의 안전한 일상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베이스캠프인지도 모르겠다. 새 냉장고를 기다리는 동안 길게만 느껴졌던 하루하루, ‘냉장고라는 존재의 중요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냉장고의 역사
냉장고는 여러 과학자의 연구가 쌓여 탄생한 발명품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리학자와 공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냉장고의 핵심 원리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18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공학자인 사디 카르노였다. 그는 ‘모든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지만, 외부 에너지를 역이용하면 열을 반대로 옮길 수 있다’라는 원리를 처음 제시했다. 에너지를 역이용한다면 물질을 냉각할 수 있다는 이 생각이 바로 냉장 기술의 출발점이다.
오늘날 냉장고의 기본구조를 설계한 사람은 1834년 미국의 제이콥 퍼킨스다. 냉매를 증발시켜 열을 흡수한 뒤 압축기로 냉매를 다시 압축하고, 냉매가 응축하면서 빼앗은 열을 외부로 방출하는 원리다. 그는 이 과정을 반복해 냉장고 내부의 온도를 낮추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암모니아와 같은 독성 냉매를 사용했기 때문에 누출 사고가 일어나면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기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한다. 1926년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는 신문에서 한 가족이 냉장고 냉매 누출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레오 실라르드는 훗날 핵 연쇄반응 개념을 제시해 원자력 시대를 연 과학자다. 그는 이 사고 소식을 아인슈타인에게 전했다. 아인슈타인은 사고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두 과학자는 냉매 없이 작동하는 ‘움직이는 부품이 없는 흡수식 냉장고’를 함께 설계해 특허를 출원했다. 이 냉장고가 바로 ‘아인슈타인-실라르드 냉장고’다.

지구 냉장고 고장이 부른 폭염
일반 냉장고는 전기모터로 냉매를 압축해 압력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냉각 효과를 얻는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는 모터나 피스톤을 사용하지 않고 열에너지와 기체의 압력 및 확산 현상을 이용하는 냉장고였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전기모터의 성능이 좋아지고 독성이 낮은 프레온가스가 등장하면서 냉장고의 효율은 몰라보게 향상됐다. 자연스럽게 효율이 떨어지는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요즘 연일 폭염 소식이 들려온다. 유럽 곳곳에서는 기온이 38~43℃까지 치솟고 있다. 특히 2003년 여름의 유럽 폭염은 최악이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에서만 약 1만 500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독거노인을 포함한 고령층이었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공동연구를 위해 프랑스에 머물곤 한다. 여름의 프랑스는 대체로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지만 그러다 사하라사막으로부터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밀려와 프랑스를 뒤덮으면 며칠씩 폭염이 지속된다. 상공에 강한 열돔이 형성돼 공기를 가두면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진다. 에어컨은 꿈꿀 수도 없고 선풍기도 없는 다락방에서 지내는 것은 고역이다. 하루에 몇 번씩 찬물로 샤워를 해도 소용이 없다.

대기는 열을 우주로 내보내는 거대한 냉장고
이럴 때는 오히려 외부에서 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덧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 열은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오래된 프랑스 건물은 벽이 두꺼워 버틸 만하지만 폭염이 2~3일 계속되면 그것도 소용없다. 다락방은 마치 뜨거운 만두 속처럼 달아오른다. 땀을 흘리며 바닥에 몸을 바싹 눕혀 잠을 청하면 온도가 떨어지는 새벽에 간신히 잠을 잘 수 있다. 이런 고통이 또 없다. 그럴 때면 빵빵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뽀송한 이불 속에서 잠들 수 있는 한국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보통 지구는 한여름에 태양열을 받아 수분이 증발하면 수증기가 엄청난 양의 열을 품은 채 구름을 만든다. 그리고 지구는 이 열을 적외선 형태로 우주로 방출한다. 냉장고가 음식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듯이 지구의 대기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열을 우주로 내보내는 거대한 냉장고 시스템인 셈이다. 그런데 평소에는 대기가 열을 우주로 내보내지만 열돔이 형성되면 이 냉각 순환이 막히면서 마치 망가진 냉장고와 같은 상태가 된다.

아인슈타인이라면 폭염 해법을 찾았을까?
인체 역시 37℃를 유지하고 있는 냉장고와 같다. 몸의 열과 방출되는 열이 균형을 이루며 체온을 유지한다. 폭염이 되면 열이 몸 안에 축적된다. 냉장고의 응축기가 고장이 났을 때 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 높은 습도는 더 치명적이다. 땀이 증발하지 못해 몸은 땀을 계속 흘리지만 냉각 효과는 없다. 심하면 심장과 여러 장기의 기능이 떨어져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살던 집에 에어컨이 없었다. 당시에는 에어컨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폭염이 이어지던 어느 여름, 결국 온 가족이 견디다 못해 맥도날드로 가서 더위를 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더위 앞엔 장사 없다.
새로운 냉장고를 설계했던 아인슈타인이 지금 살아 있다면 지구의 폭염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혹시 그의 냉장고처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이용해 냉각하자’는 발상을 가지고 지구상에 발생하는 폭염이라는 난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무더운 여름날, 망가진 냉장고 앞에서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 폭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기진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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