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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20여년 만에 쓴 거대한 성공 신화

▶하이브의 이타카 인수 환영 인사를 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하이브 유튜브 화면

1990년대 초반에 북미를 처음 방문했던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는 현대와 삼성의 해외 위상 앞에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는 부모가 자식에게 싼 맛에 첫 차로 구해주는 ‘고물 차’의 대명사였고 삼성은 싸구려 어댑터나 전선을 만드는 무명의 삼류 브랜드에 불과했다. 세계 속에 우뚝 선 우리나라 재벌의 이미지가 적나라한 실상 앞에 와장창 깨져버린 것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이제 우리나라의 차는 품질을 믿을 수 있는 차, 우리나라의 가전제품은 부자들이 선택하는 고급 상품이 됐다.
K-팝도 한때의 영세한 위상을 딛고 영광의 순간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K-팝은 ‘무명’의 설움과 싸워야 했다. 단지 가수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만드는 대중음악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서구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보아가 누군지 알아보는 건 정말 극소수의 ‘마니아’들뿐이었다. 2005년 유튜브의 시대가 열리며 그 인지도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마련됐지만 서구권에서, 특히 팝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K-팝의 위상은 자국의 인디(소규모 예산으로 활동하는 회사나 단체) 스타만도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세계 공략 20년 만에 우뚝 선 K-팝
아시아권 최고의 스타였던 비는 우리나라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저명한 미국의 레코드 관계자들을 불러 쇼케이스(선보임 공연)를 열었지만 돌아온 평가는 고작 ‘시대에 뒤떨어지는 음악’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걸 그룹이었던 원더걸스는 조너스 브러더스의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 서며 열악한 환경 속에 전미 투어를 동행했다. 그나마 그것조차 감지덕지한 기회로 여겼다. 그들의 첫 빌보드 차트 등극 역시 한인 동포들과 아시아권 상점 등을 중심으로 집중 마케팅한 결과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SM 소속 가수들이 무려 뉴욕에 위치한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합동공연을 열며 외신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가수의 무대를 보러 전국에서 현지 팬들이 몰려들자 외신들 역시 뒤늦게 K-팝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K-팝에 대한 이 뜨거운 관심은 소녀시대, 2NE1, 슈퍼주니어, 빅뱅 등으로 이어지며 북미 지역 K-팝의 첫 성공 신화를 창조해내기에 이르렀다. 이 흐름의 정점에서 K-팝 최초의 메가 히트곡인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세계 음악 지도에 K-팝을 그려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방탄소년단(BTS)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팝 그룹이 됐다. K-팝의 세계 공략 이후 20여 년 만의 일이다.
얼마 전 국내외 경제 관련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낸 뉴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하이브의 이타카 인수’ 건이다. 하이브는 BTS의 소속사인 빅히트의 새로운 이름이다. 단순히 K-팝 기획사로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사업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다. 이타카(Ithaca)는 미국 최고의 아티스트 매니저이자 레코드계의 거물인 스쿠터 브라운이 설립한 지주회사로 산하에 SB 프로젝트 등 굵직한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를 보유하고 있다.
브라운은 2010년대 미국 최고의 아이돌 스타인 저스틴 비버를 발굴해 길러낸 인물이며 아리아나 그란데 등과도 계약해 명실상부 미국 틴팝(10대들을 타깃으로 한 대중음악 장르) 산업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큰손’이다. 그가 현재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있는 가수들만으로 미국 산업의 상당 부분이 채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회사의 지분을 모두 하이브에 넘기고 스스로 K-팝 산업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상상도 못 한 문화의 역전 현상
이것은 결국 현재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BTS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과 빅히트의 스타 육성 노하우에 대한 미국 산업의 인정과 존중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불과 두 달 전 빅히트는 미국 최고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그룹(UMG)과 합작회사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SM이 캐피톨레코드와 손잡고 ‘슈퍼엠’이라는 SM 올스타 그룹을 미국에 데뷔시킨 적은 있지만 미국 굴지의 음반사가 빅히트에 사실상 제작의 전권을 맡겨 K-팝 그룹을 미국 시장에 데뷔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문화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는 것은 문화산업의 미래는 ‘팬덤(열성 팬)’에 있고 그 팬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힘에 있어서 K-팝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UMG나 브라운의 결정은 이제 미국이 이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껴안기로 했다는 방증이다. 상상도 못 한 문화의 역전 현상이다. 미국 음악산업의 절대적 위상과 우위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곳에 가든 태권도나 양궁처럼 종주국 혹은 그에 준하는 위상을 가진 분야에서는 한국인들이 주도적인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것이 K-팝인 한 우리나라 그룹은 사실상 독점적이고 우월한 기술 수준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K-팝을 팝 음악의 본고장인 미국이 적극적으로 품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흐름은 이미 거대해져 있다.

김영대 음악평론가이자 문화연구자_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K-팝에 대한 연구로 음악학(Ethnomusicology)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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