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열한 살 소년은 1•4후퇴 때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열사흘을 걸어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 정착한 이후 소년은 성당에 다니는 기쁨으로 살았다. 어느 날 계산동성당 보좌신부님이 “주일날 가톨릭신문 팔 사람?” 하고 외쳤다. 호기 있게 손을 번쩍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30명 가까운 아이 중에 혼자만 손을 치켜든 것을 알았다.
그때 보좌신부님이 급히 다가오면서 “분도야! 그건 안 돼!” 하고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놀라서 올려보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너 고생하는 것 아는데 신문을 팔다니.” 바로 그 순간 신부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학에서 35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부 수장으로 두 차례나 국정에 참여했던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가 때로는 감동스럽게 때론 담담하게 지나간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다섯 살에 광복을 맞았고, 6•25전쟁과 4•19혁명, 산업화와 민주화, 세계화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지나왔다. 10년 전 은퇴한 후 강원 고성군 토성면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삶의 진리를 깨우치며 지내고 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 1965년 가을 저자는 어렵게 오스트리아 빈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독일어 구두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어 책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말하기는 입도 떼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시험은 일주일 뒤였다.
방법은 하나. 면접자가 물을 만한 예상 질문 120개를 만들고 답변을 철저히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면접시험을 치렀다. 얼마 후 ‘우수’ 등급으로 합격했다. 큰 어려움에 처하면 자주 그때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야기한다. “걱정 마라. 분명 길이 있다.”
대학 강단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저자는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1951년 늦가을 ‘서울 피난 대구 남산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소년은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피난민이 사는 동네의 셋방살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어찌어찌해서 선생님이 다녀갔지만 친구들은 한 번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지금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수줍음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이제부터는 ‘인생 삼모작’을 해야 한다. 세 번째 못자리는 자연과 더불어 하는 삶이다. 앞으로 인생 90을 바라본다면, 70세가 넘어 이모작을 마치고도 10여 년의 여생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큰 도시를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소도시나 산촌을 찾아 자연의 품에서 좀 더 단순하고 마음 비운 삶을 영위하자는 얘기다. 시골 생활은 심신 건강에 좋고, 인생을 관조하고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아울러 인생의 마지막을 영성적으로 준비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터전이기도 하다.”
치열했던 도시를 떠나 자연의 품속에서 가꾸는 노년의 삶은 단순하다. 태풍이나 폭설을 통해 자연의 두려움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당을 가꾸고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며 땀 흘리는 기쁨을 누린다. 또한 사시사철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 꽃과 나무의 생장을 바라보는 특권을 만끽하고 있다. 이제는 돌아와 자연의 품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책 읽고 글을 쓰며 따뜻한 눈으로 미래를 조망하는 노학자의 삶에는 꽃보다 진한 향기가 있다.

기억 속의 보좌신부님
안병영 지음 | 흰물결 | 192쪽 | 1만3000원
글 · 윤융근 (위클리 공감 기자) 20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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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