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화창한 나들이 계절이다. 정부가 ‘봄 여행주간’까지 정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외친다. 또 소위 샌드위치데이(5월 6일)를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주말을 황금연휴로 만들어 여행을 권한다.

휴가와 여행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여행은 짧든 길든, 가는 곳이 멀든 가깝든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준다. 휴식과 즐거움, 그리고 자기 삶의 성찰이다. 여럿이 떠나거나 일정이 빡빡한 여행과 혼자 느릿느릿 즐기는 여행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여행에도 저마다의 색깔과 느낌이 있다.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같은 곳을 수없이 가도 그때마다 의미가 다른 것이 여행이다. 여행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 하면 장소를 먼저 떠올린다. ‘어디로 갈까’ 할 때, 그 ‘어디’는 곧 공간이다. 그러나 때로는 여행의 목적지나 대상이 시간인 경우도 있다. 그 시간은 지금일 수도 있고, 과거일 수도 있으며, 미래일 수도 있다. 어느 때이든 시간으로의 여행이 갖는 의미는 육체적 즐거움보다는 정신적 탐구와 사색이다.

 

 종묘제례악

▶ 지난해 서울 종묘, 창덕궁, 덕수궁에서 열린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 행사에 앞서 진행된 '이야기가 있는 종묘제례악' 공연 모습.

 

여행은 정신적 탐구와 사색
가까운 곳에서 수천 년 역사 체험

여행에서 현재는 자연과 경제이고, 미래는 과학과 상상이며, 과거는 역사와 기억이다. 우리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위해 유적지나 유물을 만나러 가는 이유는 그곳에 역사와 기억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멀리 가지 않고도 여행을 통해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궁과 능이다.

궁은 역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궁에서 나왔다. 물론 궐 밖 저잣거리에서도 역사는 기록되었지만, 그 흔적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지리산>의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산맥은 태양에 빛나지만 골짜기는 월광에 물든다"고도 했다.

그 서슬 퍼런 역사의 냄새, 비록 왕은 없고 빈 용상만 남아 있지만 어쩌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지금 우리의 운명을 가른 시간을 만나러 중국인들도, 일본인들도, 한국인들도 궁으로의 시간 여행을 한다. 자신들의 궁만이 아니다. 이웃 나라, 먼 이국의 고색창연한 궁궐로 여행을 한다.

능도 마찬가지다. 왕의 무덤은 죽은 자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곳은 현재이고 미래다. 그들이 만든 역사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의 작은 구릉 같은 봉분을 굳이 보려는 것은 단지 그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왕을, 그가 만든 역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소설가 이우상은 기행문집 <잠들지 못하는 역사, 조선왕릉>에서 "말 없는 무덤은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이라면서 "그 속에서 잠든 이를 깨워내면 온갖 역사적 공연이 펼쳐진다. 즐거운 여행이다"라고 했다.

그 즐거운 여행에서는 중국과 일본보다 우리가 행복하다. 서울 어디에 살아도 한 시간이면 조선의 궁궐에 들어갈 수 있다. 왕과 왕비가 살았던 4대 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이 이렇게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라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늙어가는 궁도 그리 흔치 않다. 중국 자금성을 한번 보라. 그저 엄청난 ‘크기’만 있을 뿐이다. 뜰에는 외부의 침입을 방비한다면서 나무 한 그루 심어놓지 않았고, 대전과 침실은 약탈과 절도로 빈껍데기로만 남았다.

일본의 궁궐은 어떤가. 지금의 황궁은 일왕이 거주하고 있어 넘나들 수 없고, 저 막부시대 미로와 같은 궁들은 아직까지도 암살자들의 살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궁궐은 그곳에서 폭군인 연산군이 살았든,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가 살았든, 비운의 고종이 살았든 죽음보다는 삶의 냄새가 남아 있다.

그 냄새가 곧 역사이고 시간이다. 누군가 그랬다. 궁과 능에 가면 그는 신하가 되어 왕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왜 그때 그렇게 난폭했는지 비판도 하고, 요즘 세태에 대해 상소도 올린다고. 때로는 자신이 왕이 된 마음으로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이웃과 나라의 운명을 생각해본다고. 이게 바로 궁과 능을 찾는 시간 여행이 주는 맛과 멋과 매력이다.

궁과 능에 높다란 담을 쌓고, 문을 굳게 닫아두면 그곳은 시간도 생명도 역사도 죽은 공간,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그것을 현실과 연결하고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오늘을 사는 후손들이 기꺼이 그곳으로 시간 여행을 하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봄부터 문화재청이 서울 4대 궁과 종묘에서 궁궐의 공간적 의미와 역사성을 ‘오늘’로 가져오는 ‘궁중문화축전(4월 29일~5월 8일)’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축제의 주제가 ‘오늘, 궁을 만나다’이다.

 

부용지

▶ 지난해 5월 서울 종로구 율곡로 창덕궁에서 열린 '테마가 있는 창덕궁 아침산책'에 참가한 시민들이 부용지와 주합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서울 4대 궁과 종묘에서 궁중문화축전 개최
과거로의 시간여행 남다른 즐거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제각각이듯, 궁을 만나는 것도 여행자의 마음이다. 마음속에 얼마나 과거와 만날 공간이 있는지, 그 과거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용기, 여유와 낭만이 있는지에 따라 기왓장만 보고 지나칠 수도, 창경궁에서1750년으로 돌아가 잠시나마 영조나 그의 신하가 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복궁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수라상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별빛 아래 창덕궁 뒤뜰을 거닐며 잠 못 이룬 수많은 조선의 왕과 왕비들의 고뇌와 눈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들이 속삭이는 인간적인 스토리텔링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다. 종묘는 또 어떤가.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이면 전국 곳곳의 능에 누워 있는 조선의 왕과 왕비들이 이곳으로 외출을 한다. 저 멀리 영월에서 단종도 온다. 우리 후손이 올리는 제사상을 받기 위해서다. 조선 왕들의 합동 제사인 종묘제례에서 제관은 신위를 향해 네 번 절하고, 술을 올리고, 제례악을 연주하고, 파일무를 춘다.

이날만은 500여년 조선 왕조를 어지럽게 한 원한, 배신감, 애증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런 화합의 축제이기에 종묘제례는 마냥 엄숙하고 슬프지 않다. 그 정신과 문화적 가치와 독창성으로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록되었다. 올봄에도 궁중문화축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멀리서나마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 멀다고 왕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그들에게 자신의 고민도 좋고, 나라의 운명도 좋고, 뭐든 아뢰어보라.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대현

·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05.02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