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주말에 아내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다. 변두리에 있는 해물칼국수집에서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칼국수 생각이 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칼국수는 매일 먹는 어머니의 밥상과는 다른 의미가 있어 보였다.
아주 가끔 주말에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보는 앞에서 홍두깨를 들고 우리들의 머리통을 쓰다듬어주시곤 했다. 정말 아득한 옛이야기다. 오십 년은 지났나 보다. 해물칼국수가 나오기 전에 나는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가져오셨다는 밀가루를 반죽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홍두깨가 도마 위의 밀가루 반죽을 밀어대기 시작한다. 둥글둥글하고 몽실몽실한 밀가루 반죽은 어느새 보름달처럼 둥글넓적해지면서 도마 위를 점령한다. 도마 위에 뿌려진 밀가루는 그것을 툭툭 털어대던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떨어져 나와 마침 부엌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은가루, 금가루처럼 반짝거린다.
둥글게 넓어진 밀가루 반죽을 반으로 접어 말고, 다시 접어 말고, 밀가루 반죽은 막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등어나 참치, 두툼한 생선처럼 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간혹 우리들은 그 밀가루 반죽에서 바다 냄새를 맡곤 했다.
드디어 칼을 집어 드는 아버지, 우리들을 한번 죽 둘러본다. 위대한 장군 같다. 아버지가 밀가루 반죽 앞에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충무공이자 왕건, 궁예이자 견훤이었으며 저 고구려의 주몽이었다.
우리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아버지의 그 근엄한 모습을 올려다본다. 긴장한 목울대로 침이 꿀꺽 넘어가면서 '아버지'라고 속으로 되뇐다. 아버지는 생선 대가리를 잡듯, 밀가루의 한쪽을 고정하고 드디어 칼을 댄다. 쓱쓱쓱, 밀가루가 두툼한 국수 가락으로 떨어져 나온다. 변신이다. 탄생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 이 순간 위대한 우주는 숨을 죽인다. 칼을 드는 순간 생명이 탄생한다. 적의 목을 자르는 칼이 아니라 우리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건강을 지켜주는 아버지의 칼이 국수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저 그리스의 철학자가 "유레카"라고 소리쳤듯이 이렇게 소리 지른다. "칼국수, 칼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아버지."
칼국수를 먹는다는 건, 시간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너무 과학적으로 해석을 한다. 즉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여러 종류의 비타민 등등 인간의 신체에 필요한 영양소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분석은 어린 우리들에게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칼국수는 맛있었고, 먹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낮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맛있는 시간을 먹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음식은 시간을 담는다. 이것은 먹을 것을 섭취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점이다. 위장은 시간을 담는 장소이다. 소장과 대장은 시간을 소화하는 공간이다. 똥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다.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엽록소를 만드는 것도 시간을 먹는 것이다. 칼국수는 아버지이다.
칼국수 한 그릇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고, 아버지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에 와 우리들에게 칼국수를 먹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칼국수를 제일 잘 만드는 요리사였다.
추억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 칼국수 한 그릇처럼 만드는 일, 그것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칼국수를 먹고, 나이를 먹고, 그리고 추억을 먹는다는 것. 가난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을 이제는 고마운 아내와 나누어 먹는다.
아버지는 가끔 말씀하셨다. "먹는 대로 간다. 잘 살려면 잘 먹어야 한다." 훗날 이 말은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라는 말과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도 맛있는 한 끼를 잘 드시길 바란다.
글 · 원재훈 (시인)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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