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나는 여행을 사랑하지만 사실 집에 있는 것이 더좋을 때도 많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그냥 편안하게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매번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나의 여행은 곧잘 ‘무언가 글을 쓰기 위한 사전답사’가 되어버릴 때가 많아서, ‘그곳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떠났다가도 ‘거기 뭔가 글을 쓸 만한 소재가 없나’ 열심히 찾아다니는 종종걸음이 되어버리곤 한다. 해변에 파라솔을 놓고 선베드에 누워 느릿느릿 책을 읽는, 그야말로 제대로 쉬는 여행은 거의 해보질 못했다. 겨울은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기에 더더욱 ‘여행 그 자체를 위한 여행’은 떠나지 못하던 중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오직 여행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진주에서 이틀 연속으로 강연 일정이 잡혀 진양호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다. 우선 처음 보는 진양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겼다. 서울에서 진주로 가는 길은 꽤 멀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진양호의 고요한 밤 풍경을 배경으로 유리알처럼 맑은 겨울 하늘 아래로 쏟아지는 별빛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그다음 날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강의를 마치고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로 향했다. 진주성에는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온기’가 더 많이 남아 있는 듯한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 호국사 등 볼거리가 풍부할 뿐 아니라 그 안을 걷는 것 자체가 과거를 향해 떠나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 들었다. 진주성 성곽 아래로 눈부시게 펼쳐지는 남강의 절경을 매일 볼 수 있는 진주 시민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일 때문에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진양호의 새벽, 아침, 낮, 밤을 샅샅이 볼 수 있었다는것, 진주성 구석구석을 옛사람의 눈빛으로 차근차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다음 날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진주에 이어 대구에서 강연이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전화를 해보니 내가 스케줄을 잘못 기억한 것이었다. 휴대전화에 있는 스케줄 표에 일정을 표시해놓았는데, 그만 전혀 다른 날짜에 표기를 해놓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낭패였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더 멀리, 더 화끈하게 떠나보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매번 미루고 미루던 남해 금산 보리암이 떠올랐다. 이성복의 시‘남해 금산’이 저절로 떠올랐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혼자 잠기네.’
사랑 때문에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버린 한 남자의 절절한 고백이 ‘남해 금산’에 잠겨 있는 바로 그곳으로. 보리암은 과연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절경이었고, 금산을 오르는 길 곳곳이 영원히 눈 속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으로 가득했다. 너무 아름다운 곳에 오니 오히려 사진을 덜 찍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풍경을 구겨 담는 모든 노력을 멈추고, 실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그 풍경에 취해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또다시 달려가고 싶다. 이번엔 일 때문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남해 금산을 위한 여행을, 아무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여행 자체를 위한 여행’을 꿈꾼다.
글· 정여울(문학평론가)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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