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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시인 원재훈] 실은, 마음이 없었다

경기 일산 마두도서관 사거리에는 빨간 우체통이있다. 그곳은 그냥 지나치는 장소였지만, 산책을 하거나 외출을 하면서 가끔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편지 한 장 쓸 일이 없어진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대에 간 남자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면서 우체통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 집 따님이 물었다. 이 동네에서 10년 이상 살았는데 따님께서는 집 근처에 있는 우체통을 보지도 않은 것같았다.

나와 함께 그 자리를 확인한 따님은 밤늦도록 편지지에 마치 일기를 쓰듯이 편지를 써서 다음 날 새벽 우체통까지 걸어가 편지를 넣었다. 따님이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 정성스럽게 봉투에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우표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390원짜리 우표는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다가왔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따님이 쓰다 남은 우표가 있다. 우표는 한 장씩 떼어내기 좋게 테두리에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 자리를 천공(穿孔)이라고 부른다.

 

편지

ⓒpixabay

 

그래, 우표에는 천공이 있다. 천공이 없다면 매번 번거롭게칼과 자가 필요할 거다. 천공은 매우 유용하다. 우표가 떨어질 때 나는 ‘도도독’ 소리도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소리가 재미있어 새 우표를 일부러 뜯어내기도 했다. 천공 자국이 남아 있는 우표를 보면서 우리들의 추억도 우표처럼 천공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면서 추억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 순간을 네모진 우표처럼 잘 뜯어낸다. 그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도안을 한 우표를 붙인 편지나 엽서를 누군가에게 보낸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풍요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도 천공이 있다. 연말연시에 모임을 끝내고 서로 헤어질 때, 연인들이 결별할 때, 연로하신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 관계를 이어주던 천공 자국은 도드라지게 남게 된다. 동그란 천공이 절반으로 나뉘어 붙어 있는 편지봉투의 우표처럼 우리들도 만나면 헤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 우표처럼 천공이 있어야 헤어지기가 덜 힘들 거다. 우리들은 영원히 헤어지기 싫은 마음 때문인지천공을 만들길 싫어한다.

하지만 그 자리는 세월이 가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알고 지낸 사람과의천공이 있는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지만, 아마도 헤어지는 순간에 우표를 뜯어내는 느낌처럼 서로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빨간 우체통까지 걸어가 편지를 보내는 그 마음이 아닌가 싶다. 편지는 서로 멀어진 사람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기도 하다. 문득 윤동주의 ‘편지’라는 시가 떠오른다.

누나! / 이 겨울에도 /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 눈을 한 줌 넣고 /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 말쑥하게 그대로 /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 눈이 아니 온다기에.

전국적으로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있고 우체통도 이제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시대가 변해도 우리들의 정서에 필요한 원시적인 감정들이 있다. 동네 우체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딸아이가 빨간 우체통을매일 찾는 것을 보면서, 타인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은 밤늦도록 한 자 한 자 펜으로 적은 정성스러운 편지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표와 우표를 이어주고 있는 천공을 보면서 내가 지난 한 시절 보내던 편지들이 지금은 저 눈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아주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들은 내 기억에 천공 자리를 내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이제 되살리고싶다. 우체통은 항상 거기에 있으니.

 

글· 원재훈(작가)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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