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낙선재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궁궐로 여겨졌고,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해 동궐(東闕)이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함양문(涵養門)을 통해 창덕궁과 창경궁을 오갈 수 있지요. 함양문 맞은편에는 중희당(重熙堂)이라는 전각이 있었지요. 중희당은 정조가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위해 지은 전각입니다. 하지만 문효세자가 안타깝게도 5세에 세상을 떠나 중희당은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중희당도 사라지고 부속 건물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중 칠분서는 중희당과 이어진 복도각이었고, 삼삼와는 육각 지붕의 정자입니다. 삼삼와에 이어진 복도 끝에는 2층 누각인 승화루가 있습니다. 승화루는 소주합루(小宙合樓)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으로 미루어 임금과 관련된 책과 서화를 보관하고 세자가 공부하던 장소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 석복헌은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지내던 곳이었다. ⓒ윤상구
승화루를 지나쳐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가 있습니다. 이 일대를 통틀어 낙선재(樂善齋)라 일컫기도 하지요.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새로 단장한 집들입니다. 제24대 임금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장남입니다. 헌종은 4세에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할아버지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헌종 비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 헌종은 계비를 맞이했습니다. 그때 특이하게 헌종은 계비 간택 자리에 직접 참여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후보자로 나온 한 아가씨(훗날의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지요. 그러나 간택의 결정권자인 대왕대비는 김씨가 아닌 효정왕후 홍씨를 최종 간택했습니다. 
▶ 낙선재 전경 ⓒ윤상구
3년 후, 헌종은 효정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지낼 별궁으로 낙선재를 꾸민 것입니다. 헌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 2년 동안 낙선재에 머물면서 경빈 김씨와 함께 그림과 글씨를 즐기며 지냈다고 합니다.

▶ (좌)낙선재 입구 장락문. 즐거움이 오래가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다. (우)낙선재 누마루 밑에는 빙열문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이 무늬는 불과 상극인 얼음을 상징한 것이다. ⓒ윤상구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입니다. 즐거움이 오래가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지요. 단청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지었지만 낙선재의 누마루 밑에는 빙열문(氷裂紋 : 얼음 표면이 갈라진 듯한 무늬)의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무늬는 불과 상극인 얼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 석복헌 후원에는 한정당이 있다. 맑고 고요함을 받아들인다는 이름의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창문에 유리를 사용하는 등 현대식 건축기법이 가미됐다. ⓒ윤상구
석복헌(錫福軒)은 경빈 김씨가 지내던 곳입니다. 석복헌 옆의 수강재(壽康齋)는 할머니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아 대왕대비 처소로 고쳐 지은 집입니다. ‘수강’이란 장수와 강녕을 뜻하므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한 이름입니다.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한 장소입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습니다. 또 이곳에서는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수강재에서는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고종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이후의 삶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덕혜옹주는 15세에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일본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의 공주라며 심한 따돌림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까지 얻었습니다. 게다가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해 쓰시마 섬의 도주였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을 했습니다.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한 옹주는 1955년 다케유키와 이혼했습니다. 외동딸 마사에는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옹주의 병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1962년 1월, 덕혜옹주는 38년 만에 마침내 고국에 돌아왔고 이후 수강재에서 지냈습니다. 1983년, 덕혜옹주는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 여사)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낙서를 남겼는데, 이후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6년 후인 198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낙선재 후원에는 상량정이 있다. 육각 지붕의 정자로 원래 이름은 평원루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뀌었다. ⓒ윤상구
낙선재 일대의 각 건물 뒤에는 아름답게 꾸며놓은 화계와 굴뚝이 있고 각각 별도의 후원이 딸려 있습니다. 낙선재 후원에는 상량정(上凉亭)이 있지요. 육각 지붕의 정자로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평원’은 먼 곳과 가까이 지낸다는 뜻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의미가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겠지요. ‘상량’은 서늘한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피서를 위한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석복헌 후원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있습니다. 맑고 고요함을 받아들인다는 이름의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창문에 유리를 사용하는 등 현대식 건축 기법이 가미됐습니다. 수강재 후원에는 취운정(翠雲亭)이 있습니다. 취운정은 숙종 때 지어진 것으로 낙선재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낙선재를 나와 왼쪽 방향에는 구름다리로 종묘와 통하던 문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길의 복원 공사를 하고 있어 구름다리는 없어지고 문도 굳게 닫혀 있습니다. 머지않아 종묘와 이어진 예전 모습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