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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왕비가 낳는 임금의 적자만 태어나는 곳, 대조전

창덕궁의 청기와집 선정당 오른쪽에는 희정당(熙政堂)이 있습니다. 희정당은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공간입니다. 일반적으로 희정당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건물은 희정당 앞에 지어진 행각(行閣)이고 본 건물은 마당 안쪽에 따로 있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지요. 행각 정문은 서양식 현관처럼 생겼는데 그것은 이 무렵 왕실의 자동차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변형한 것입니다.

희정당, 대조전

▶ 1, 2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공간이던 희정당.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희정당 내부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고 순종 때 쓰던 탁자와 의자 등 서양식 가구들이 놓여 있다. 3 ‘큰 것을 만든다’는 뜻을 지닌 ‘대조전’. 왕비가 낳는 임금의 적자만 태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후궁들은 각 처소에서 후사를 보았다. ⓒ윤상구

선정전과 희정당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희정당 뒤편이 나옵니다.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희정당 내부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고 순종 때 쓰던 탁자와 의자 등 서양식 가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희정당 바로 뒤에는 대조전(大造殿)이 있습니다. 대조전은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며 왕비가 정치를 하는 중궁전입니다. ‘대조’는 큰 것을 만든다는 뜻인데 그 ‘큰 것’은 임금의 자리를 이어갈 왕자를 말합니다.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자식은 왕비가 낳은 적자니까요. 적장자가 임금의 자리를 이르면 왕위 계승에 따른 여러 가지 잡음과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었지요. 그러니 대조전은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조전에서는 적자만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후궁은 저마다 자신의 처소에서 출산했습니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났고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래의 대조전은 1917년 화재 때 소실되었고 1920년 복구공사 때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을 헐어 옮겨와 지금의 대조전을 지었습니다. 대조전도 다른 궁궐의 중궁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지어졌습니다. 내부에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습니다. 대청마루에는 자개로 장식된 의자가 놓여 있고 왕비의 침실이었던 서온돌에는 용이 조각된 서양식 침대가 있습니다. 이 침대는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 황후(순종비)가 사용했던 것입니다.

대조전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날개처럼 붙은 익각이 흥복헌(興福軒)입니다. ‘흥복’은 복을 일으킨다는 뜻이지만 이곳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순종 3년(1910) 8월 22일, 일본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 ‘한일합병조약안’을 최종 승인하고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습니다. 순종이 주재한 마지막 어전회의였지요.

흥복헌, 관물헌

▶ 4 흥복헌은 ‘복을 일으킨다’는 뜻이 있지만 이름과 달리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순종 3년 일본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 ‘한일합병조약안’을 최종 승인하고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5 대조전 뒷마당에는 벽돌로 쌓은 화려한 굴뚝이 서 있다. 굴뚝에는 토끼 문양도 있는데, 토끼가
사는 달과 같은 신선의 세계에서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6 ‘緝熙(집희)’라는 현판이 붙은
관물헌(觀物軒)도 있다. ‘집희’는 계승하여 밝힌다는 뜻이다. 선대 왕의 덕을 계승하여 밝은 정치를 베풀고자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윤상구

 병풍 뒤에 숨어서 어전회의를 지켜본 순정효 황후는 덕수궁에 있는 시아버지 고종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전화선을 미리 끊어버려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황후는 옥새를 빼앗기지 않으려 치마폭에 감췄답니다. 하지만 황후는 삼촌인 윤덕영(尹德榮)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조약은 8월 29일 선포되었고 대한제국은 그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1926년 이곳 흥복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조전 뒷마당에는 벽돌로 쌓은 화려한 굴뚝이 서 있습니다. 굴뚝에는 토끼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토끼가 사는 달과 같은 신선의 세계에서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대조전 뒷마당에도 화계(花階)가 펼쳐져 있습니다. 경복궁 아미산만큼 공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궁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왕비의 답답함을 덜어주고자 하는 배려가 담긴 공간입니다.

화계를 따라 계속 가면 경훈각(景薰閣) 뒤쪽으로 통합니다. 경훈각 뒤편 모서리 부분에는 작은 여닫이문이 있는데 이 문 안에는 이동식 변기인 매화틀이 있었습니다. 임금이나 왕비가 용변을 본 매화틀은 바퀴 달린 작은 수레에 담아 끌어냈는데 담당 궁녀나 내의원 의관이 그 용변을 보고 임금이나 왕비의 건강을 살폈지요.

경훈각은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 받은 관복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어필을 보관했던 곳입니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 경훈각은 경건하게 지켜져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경훈각에서 복도각을 지나면 서양식 부엌이 있습니다. 1920년대까지 사용되었던 수라간이지요. 수라간을 지나면 다시 대조전 앞뜰로 나오게 됩니다.

희정당 옆을 지나쳐 담을 끼고 돌면 영현문(迎賢門)이 있습니다. 영현문에 들어서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성정각(誠正閣)입니다. ‘성정’은 올바른 것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이곳은 세자의 교육을 위한 장소였지요. 지금은 성정각이라는 이름은 걸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각에 ‘保護聖躬(보호성궁: 임금의 옥체를 보호함) 調和御藥(조화어약: 임금의 약을 조절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마당에 약재를 다루던 돌절구 등의 도구들이 놓여 있어 1920년 이후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입니다.

오른쪽 누각 뒤편에는 ‘緝熙(집희)’라는 현판이 붙은 관물헌(觀物軒)이 있습니다. ‘집희’는 계승하여 밝힌다는 뜻입니다. 선대왕의 덕을 계승하여 밝은 정치를 베풀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지요. 현판은 ‘甲子元年(갑자원년)’에 쓴 어필로, 1864년 13세였던 고종이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물헌은 고종이 적장자 순종을 얻은 곳이며 갑신정변 때 3일 동안 개화파와 함께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개화파는 이 관물헌에서 국정 혁신을 논의하여 14개조의 혁신 정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혁신 정강을 공표하기도 전에 청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창덕궁을 공격하였지요. 개화파를 도와주기로 약속한 일본 군대는 물러나고 고종도 창덕궁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개화파의 집권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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