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설국>은 이 첫 문장으로 유명하다. 절창의 가수가 입술을 열고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처럼,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의 도입부처럼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지배하면서 주인공들의 삶과 죽음, 사랑이 독자의 마음에 각인된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간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눈이 내리는 것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을 '설'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많다. 설이 지나기 전까지는 연말 분위기다. 설날 오랜만에 만나는 집안 어른들께 세배하고, 아이들의 작은 손에 세뱃돈을 쥐여줘야 새해가 시작된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 따뜻한 떡국 한 그릇과 더불어 덕담을 나누면서 말이다.
설은 매년 1월 1일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설은 겨울의 한중앙에 있으면서 과거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설이 지나가면 눈의 고장처럼 아름다운 나날들이 펼쳐져 있을 것 같다.
거기엔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어떤 이야기로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채워질 것인가 기대감을 갖게 된다. 매년, 매월, 매일이 한 조각의 퍼즐 조각이라면 설을 기점으로 부분들이 모여 전체가 완성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인지 설이 가까워지면 미완의 원고를 퇴고하는 자세로 그동안 내가 한 일들을 더듬어본다. 잘 자란 대나무의 마디처럼 인생의 한 획을 긋고 그동안 진행했던 일의 마무리를 잘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이 중요한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면 설 전에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설령 그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미련을 품지 말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에 굵은 대나무의 마디 하나를 만들어두고 올해를 희망차게 맞이하자.
당신의 첫 문장은 무엇으로 하고 싶은가? 그 문장을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다음 문장도 좋을 것이다. 인생은 한 단락의 문장을 쓰는 일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촘촘해야 한 단락이 완성된다. 그럼 나는 첫 문장을 무엇으로 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금 쓰고 있는 원고의 첫 문장부터 잘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은 바람이 있다. 가능하다면 설이 되기 전에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평선처럼 길게 이어진 생의 행로를 더듬어본다면 겨울나무처럼 메말라버린 몸과 마음에 다시 수액이 차오르지 않을까. 그 힘으로 첫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을 쓰면서 살아가리라.
혹시 생활에 지쳐 경황이 없고 마음이 급해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선 일기나 편지, 혹은 에세이 한 편을 작은 마음을 가지고 쓰면서 시작하면 어떨까?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문장을 통해 쓰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일본 작가의 첫 문장보다 당신에게 큰 힘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작업실의 창문으로 큰 나무가 보이고 거기에 까치집이 있다. 저 까치들은 어쩌자고 저토록 크게 둥지를 지었을까. 그것도 상하로 두 채씩이나. 거기에 까치가 날아오고 있다. 찬 바람이 불고 눈이 오지만 까치는 올겨울에도 역시 부지런하다. 까치야, 까치야, 잔가지 같은 내 근심 걱정을 물고 가서 너의 둥지를 만들어라. 너의 둥지에 새알 같은 희망을 던진다. 그것을 잘 품어서 크고 멋진 날개를 가진, 저 하늘을 비상하는 새로 날게 하라.
글 · 원재훈 (시인) 2016.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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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