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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시인 원재훈]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

오늘 새벽에 산책을 하면서 한적한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버스 정류장의 광고 설치판에 달팽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달팽이를 오랜만에 보는 터라 신기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언제부터 기어 올라온 것인지 꽤 기다란 흔적이 광고판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겨우 그 자리를 지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순식간에 옮기는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밤새 기어 올라오는 달팽이,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갈 길을 가는 시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음유시인들을 생각한다.

 

달팽이

ⓒpixabay

 

오랜만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가요 LP판을 다시 찾아서 몇 곡을 들었다. 청춘 시절에 즐겨 들었던 음반들이고, 어떤 판은 분실해서 꽤 비싼 값을 주고 새로 사기도 했다. 이들의 노래가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가사다.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판의 이면에 있는 가사들을 읽으면 그 시절이 생각나면서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가사라 해도 시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우열을 따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사는 악기와 목소리가 함께하는 음악의 일부이고, 시는 문학 그 자체다. 가사는 노래를 부를 때 온전하게 그 작품이 살아나지만, 시는 찢어진 신문지 조각에 적어놓아도 완성된 작품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였던 아프리카의 작가 응구기는 케냐의 지도층을 풍자한 희곡을 썼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돼 화장실의 휴지에 몰래 소설을 적었다고 한다. 그 소설이 국내에 초역되었는데 제목이 〈십자가 위의 악마〉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시와 소설은 딱히 음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미당의 시와 김민기의 가사를 두고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둘 다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와 가사는 굉장히 다르다.

나는 김민기에게 소월시문학상이나 미당문학상을 수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음유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한국 문단이 그의 시를 사랑하면서 문학상을 수여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가수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구역이 다른 것이다. 음유시인이라는 말로 적당히 넘어간다고 가수가 시인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시인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너무 흔하고 시시한 것이다. 요즘에 누가 시인이라고 대단하게 보겠는가. 오히려 가수들이 더 사랑받고 있다. 사실 이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시인은 달팽이처럼 지나간 자리가 그리 선명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길이 그렇게 찬란하지도 않다. 황금찬 시인이 나에게 선물한 도자기에 선생의 이런 시가 적혀 있다.


지금 그 길은 / 행복으로 가는 / 찬란한 길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길을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걸어가고 있다. 내가 새벽에 본 달팽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밥 딜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노벨문학상 거부해버려라. 프랑스의 사르트르처럼 노벨상을 거부하는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노래로 불러라. 그럼 당신은 시시한 시인이 아닌 불멸의 아티스트로 남을 것이다.

 

글· 원재훈(시인) 201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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