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간혹 바다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 지금이 그렇다. 간절하게 바다를 보고 싶어 당장이라도 차를 타고 도로에 나가고 싶다. 하지만 어른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잠시 참는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의 해안선을 따라 일 년 동안 섬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해운항만청의 협조로 우리나라의 등대 기행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전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1300장가량의 원고에 마침표를 찍어서인지 지친 심신이 바다를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때 보았던 바다와 섬, 그리고 내 청춘의 스토리들을 엮어 짧은 느낌의 긴 소설을 썼다.
서해에서부터 남해 그리고 동해를 여행하면서 등대가 바다를 향해 내는 불빛이 서로 다른 시간대로 점멸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불빛으로 밤바다를 항해 중인 선원들은 그 섬의 이름을 구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깜깜한 밤바다에서 서로 다르게 깜빡거리는 등댓불은 결국 제 이름으로빛나고 있는 것이다. 섬으로 가기 위해 항구에 가면 이곳이 육지의 끝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설레곤 했다. 육지의 끝에서 바다는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을 돌아다니면서 육지의 끝은 항구나 해안선이 아니라 섬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섬에서 바다로 더 나아갈 수가 있고,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등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섬은 꽃이 진 자리에 열리는 바다의 열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때 한 신문에 등대 기행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신문사 기자이기도 한 친구 하나가 이런 좋은 경험으로 소설을 안 쓰고 뭐 하느냐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섬이나 등대를 소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0년이나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 소재를 사용해 작업을 하면서 내 몸속에서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발현됐다. 어떤 경험들은 당장이 아니라 조금 거리를 두고 그냥 놓아두어야 자연스럽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좋은 효모로 잘 숙성된 빵이 맛있는 것처럼.
졸작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출간되기 15년 전인 1936년에 발표한 〈푸른 파도 위에서-멕시코만류에서 보낸 편지〉라는 산문에서 시작됐다. 이 세계적인 걸작은 오랜 세월 동안 작가의 내면에서 숙성된 후 만들어진 작품이다. 요즘의 세태는 무엇이든 당장, 금방, 빨리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모든 작업이 숙성의 기간을 기다릴 수는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은 분명히 악습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병들고 아픈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조급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조금 천천히 해도 되는 일들, 아니 천천히 해야 좋은 일들을 한번 노트에 적어보자. 그때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노트를 여행을 떠나 만난 작은 섬처럼 여겨도 좋다.
섬에 가서 하루라도 머물러 있으면 우선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면적이 작기 때문에 조용하고 자연 풍광이 풍만하고 아름답다. 서해의 고도인 격렬비열도와 어청도에서 본바다의 푸른 빛깔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곳에서 나는 머나먼 대양의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0년이나 지났다. 이제야 그 경험 중에서 바다의 섬과 같은 문장을 건져 다듬어내지만 기쁨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한다. 도대체 나는 왜이렇게 느려터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섬은 육지의 끝이다. 그 말은 그곳이 바다의 시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올여름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가서 더위를 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당장의 성과와 결과에 조급하게 굴지 말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외롭게 기다리는 시간을 올여름에는 경험하고 오시길 바란다. 일찍 피는 꽃보다는 늦게 열리는 열매가 우리들의 삶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인생 후반부를 준비하는 중년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 원재훈 (시인)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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