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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 지금] 시상식, 존재가 빛날 때

해마다 2월 마지막 주 일요일(한국은 다음 날인 월요일 오전)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영화 팬들이 이 축제를 기다렸다.

위성 생중계로 시상식을 보면서 어느 작품과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영광의 오스카상 주인공이 될지 점치기도 했다. 총출동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하고 섹시한 의상을 뽐내는 것도 볼거리 중 하나다.

아카데미 수상은 영화 흥행의 보증수표이기도 하다. 작품상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한 부문만 수상해도 그것으로 세계 영화 관객들의 관심을 끈다. 심지어 앞서 개봉했을 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영화라도 일단 오스카상을 수상하고 나면 평가가 달라지면서 재개봉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때 ‘아카데미 특수’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오스카상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고 있다. 한국처럼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의 힘이 예전 같지 못한 이유도 있다. 할리우드의 위력은 세계 영화 시장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여전히 막강하지만 상이 상답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상이란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그 가치가 살고, 그 상을 받은 사람도 떳떳한 ‘역사’가 된다.

아카데미는 프랑스 칸, 이탈리아 베니스, 독일의 베를린으로 대표되는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종상과 같은 미국 국내 영화제다. 그래서 미국 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할리우드가 가진 위력과 상징성, 그 영향력이 워낙 크기에 기대가 남다르다. 그런데 아카데미는 작품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미국 우월주의와 애국주의, 인종주의, 미국식 정의와 휴머니즘에 사로잡히거나, 때론 정치적인 선택으로 실망을 안겨주면서 스스로 권위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여전히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다. 우리에게도 그렇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의 한(恨)을 풀었지만, 유일하게 외국작품에 문을 열어놓은 외국어영화상에 일본, 중국, 홍콩, 이란과 달리 아직도 수상은 고사하고 후보작에도 한 번 오르지 못한 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우리 영화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도, 우리 영화의 세계 시장 확대를 일시에 보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정치적이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카데미를 그래도 권위와 감동이 살아 있는 축제로 만드는 것은 그 정치성과 상업성을 뒤집고도 남을, 예술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는 감독과 배우들의 수상 소감이다.

“2015년은 역사상 가장 더웠던 해로 기록되었으며, 저희가 촬영할 당시 눈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남쪽 끝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인류와 동물을 위협하는 가장 긴급한 사안이며 힙을 합쳐 지금 그 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환경오염을 범하는 거대 기업을 위한 지도자가 아닌, 전 인류와 원주민 생태 변화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혜택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우리 자녀들의 아이들,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에 의해 목소리를 내지 못한 분들, 이런 분들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지지해야 합니다. 지구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저도 오늘 밤 이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난해 이맘 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 생활 23년 만에, 그리고 여섯 번이나 후보에 오른 끝에 ‘마침내’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수상 소감이었다. 그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촬영의 어려움을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지구 환경 보호를 강조했다.

이 별난 수상 소감에 동료 배우들과 영화 팬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환경운동가, 유엔 평화대사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감동의 갈채를 보냈다. 실제로 디카프리오는 2016년 개봉한 피셔 스티븐슨 감독의 다큐멘터리 <비포 더 플러드(Before the Flood)>에서 제작자이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2년 동안 북극에서 적도의 섬까지 찾아다니며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고발했고, 파리기후변화협약 서명식에 참석해 세계 지도자들을 향해 같은 호소를 했다.

오스카는 2002년에야 흑인에게 여우주연상의 문을 열었다. 무려 74년 만으로 아카데미가 얼마나 인종차별적인지 말해준다. <몬스터 볼>로 첫 주인공이 된 핼리 베리는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과거와 현재 흑인 여배우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 뒤, “오늘 밤에 문이 열렸다. 지금은 이름 없고 얼굴 없는 모든 유색인종 여성을 위한 순간”이라는 역사에 남을 말을 남겼다.

그녀의 수상 소감을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듯, 올해 아카데미는 인종 화합의 축제를 만들었다. 일등 공신은 트럼프 대통령. 그의 반이민정책과 인종차별주의가 할리우드 스타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오스카상을 가장 ‘긍정적인 정치색’으로 물들게 했다. 그 결과 트럼프를 풍자하고 비난하는 몸짓과 목소리가 시상식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지난해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는 비판으로 권위를 망쳤던 것과 정반대로 흑인과 무슬림 출신들에게 무더기로 상을 안겼다.

그중 한 사람은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 <펜스>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비올라 데이비스. 2년 전 흑인 여배우 최초로 에미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색인종을 다른 사람과 구분 짓는 단 한 가지는 기회뿐”이란 유명한 수상 소감을 남긴 그녀가 이번에는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과 의미를 진솔하게 고백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지만 결국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바로 묘지지요. 사람들은 저에게 묻곤 했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 비올라? 나는 그들을 다시 살려내고 싶었어요. 큰 꿈을 가지고 살았지만 실현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에 빠졌지만 이루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 말이에요.”

이렇게 오스카상의 주인공들은 영화로 꿈을 심어주고 때론 세상을 바꾸기도 하며, 무대 위에서 짧지만 인생과 예술,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삶의 가치를 일깨우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할리우드 스타들을 단순한 배우 이상의 존재로 만들고, 아카데미의 역사와 감동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다.

영화 문라이트 감독 배리 젠킨스

▶ 아카데미 시상식은 정치적 또는 상업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다. 시상식의 권위와 감동을 살리는 주요한 요소는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양심이 살아있는 감독과 배우들의 수상소감이다. 2월 26일(현지시각) LA에서 열린 제 8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세계가 지켜본 ‘2분 25초 해프닝‘ 끝에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 ⓒ연합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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