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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연산군, ‘흥청망청’의 기원

경복궁 근정전 앞을 지나 왼쪽 문을 지나면 수정전(修政殿)이 나옵니다.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지요. 그런데 세조가 집권하면서 현판을 떼어버렸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 집현전 학사들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고종 때 중건하며 ‘수정전’이라 불렸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정부기관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94년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적 근대 개혁인 ‘갑오개혁’이 만들어졌습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사이에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지요. 이때 신분제와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과부의 재가가 가능해지는 등 조선의 관습과 제도가 대폭 바뀌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전근대와 근대로 나눌 수 있는데, 갑오개혁은 그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개혁의 중심인물들은 친일 정권의 개화파 관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컸던 조선 민중들은 이 개혁에 반발했고, 이러한 반감은 이후 항일 의병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정전 뒤편에는 경회루(慶會樓)가 있습니다. 원래 경회루 주변은 사방에 담이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담을 허물어버려 지금은 경회루 동쪽과 북쪽 담만 남아 있습니다. 경회루는 동쪽 담에 있는 자시문(資始門), 함홍문(含弘門), 이견문(利見門)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시문’은 임금이 사용하던 문으로 그 규모가 다른 문들에 비해 크고, 안쪽에는 어도가 구분된 삼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함홍문’은 왕실 가족이, ‘이견문’은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입니다.

경회루 건물을 받치는, 누각 아래 기둥인 누하주(樓下柱) 중 바깥 기둥은 사각기둥이고 안쪽 기둥은 원기둥입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개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지요. 경회루의 누하주는 48개입니다. 아미타불이 비구로 수행할 때 48개 서원을 세우고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한 숫자입니다.

누각 내부의 마루는 3단으로, 피라미드처럼 중앙이 높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중앙의 높은 자리는 연회 때 임금이 앉는 자리입니다. 가운데 자리는 3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3은 ‘천지인(天地人)’을 뜻하지요. 3칸의 공간을 그 바깥과 분리하는 기둥은 8개인데 ‘8괘’를 의미합니다. ‘괘’는 태극기 네 귀퉁이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을 층으로 쌓아 보여준 것입니다. 중간에 있는 기둥 사이의 칸은 12개인데 이는 1년 ‘12달’을 뜻하고, 바깥 기둥 24개는 ‘24절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경회루는 불교와 유교 사상에, 백성들의 농사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담아 지은 건물입니다.

경회루 내부에서 보이는 바깥 경치는 액자에 담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건물의 기둥이나 창에 당초문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것을 낙양각(落陽刻)이라 하는데, 경회루의 낙양각이 멋진 액자 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경회루 지붕에는 11개의 잡상(雜像)을 올렸습니다. 잡상의 숫자만 봐도 근정전이나 숭례문보다 훨씬 호화롭게 만들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회루는 원래 사신 접대용으로 지어진 건물로,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입니다. 현판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썼지요. 

경회루를 보면 연산군의 방탕한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경회루에서 날마다 연회를 열며 그 자리에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조직을 동원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지요. 하지만 경회루를 가장 활발하게 사용한 임금은 세종입니다. 세종은 궁중 연회는 물론 기우제, 무과 시험, 활쏘기 시범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경회루를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승자가 쓰게 마련인 역사에서 패자인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놀았다고 기록된 것뿐이지요.

경회루 이미지

▶1 수정전.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되었고 1894년엔 조선의 근대 개혁인 갑오개혁의 산실이기도 했다. 2 수정전 뒤편 경회루 전경. 3 경회루 지붕 위 11개 잡상. 4 제1공화국 시절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하향정. 조선시대 유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철거 위기까지 갔으나 우여곡절 끝에 존치 결정이 내려져 여전히 경회루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윤상구

경회루에서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곳도 경회루였습니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독점한 수양대군은 단종 주변 사람들을 귀양 보내는 등 단종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455년 윤6월 11일, 측근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단종은 선위 교서를 내렸습니다.
 
그날, 동부승지 성삼문이 옥새를 가져와 경회루에 나온 단종에게 바쳤습니다. 수양대군은 엎드려 울면서 한사코 사양했지만 단종이 옥새를 잡아 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옥새를 받았습니다. 그로서는 형식적 예는 다 갖춘 셈이지요. 이때 사육신 중 하나인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그를 말렸다고 합니다. 또 옥새를 경회루로 가져온 장본인이 성삼문이라는 사실도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경회루 왼쪽 뒤편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연꽃 향기’라는 뜻의 하향정(荷香亭)입니다. 이 정자는 제1공화국 시절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만든 시설입니다. 한때 이 건물은 조선시대 유적이 아니니 뜯어내야 한다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2013년 문화재위원회는 출석 위원 12명 만장일치로 “그대로 존치한다”라고 의결했습니다. 하향정이 경회루와 연못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당대 최고 목수가 건축한 건물이며, 대통령의 휴게 공간으로 사용되는 등 근대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역사의 참 가치는 보다 크게, 또 보다 멀리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여기서 얻은 것 같습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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