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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 지금] 거실로 그림을 초대하는 즐거움

한 가수의 그림을 놓고 세상이 시끄럽다. 논란의 핵심은 그가 그린 그림이 딴 사람이 그려준 대작(代作)이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진상은 검찰의 조사로 밝혀질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이 우리 미술계의 현실과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예술은 그것이 음악이든, 연극이든, 미술이든 창작자의 혼과 열정, 상상력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것은 명성과 크기에 상관없다. 이는 작가의 기본 양심이자 책임이며, 자부심이기도 하다. 만약 한 평론가의 말처럼 “대작(代作)이 관행”이라고 해도 예술로서의 존재 의미를 팽개치는 잘못된 관행이라면 나부터 바로잡는 것이 예술가의 양심이고 책임일 것이다. 관행을 핑계 삼아 스스로 예술혼을 버린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단지 상업적 이익만을 노린 것이라면.

그림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예술도 없다. 미술만큼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예술도 없다. 태어나면서 글씨보다 먼저 만나는 것이 그림이고, 먼저 해보는 것이 그림이다. 어쩌면 그림이야말로 삶의 시작이고, 삶 그 자체이고, 삶의 다양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누가 그렸건 그림은 그 자체로 ‘나’이기에 소중하다.

 

 거실로 그림을 초대하는 즐거움

▶ 올해 5월에 열린 부산 지역 최대 규모의 국제아트페어 행사인 ‘아트부산 2016’ 전시장 모습.

 

 

진정한 그림의 가치는
그린 사람의 느낌과 사랑

이 때문에 그림에 값을 매기는 자체가 억지라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그림의 가치는 그린 사람의 느낌과 사랑이 얼마나 들어가 있느냐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단지 유명한 사람이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그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이 유명해서 그림도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유명해지면 그것을 그린 사람도 유명해지는 것이 바른 이치이다. 피카소도 그랬고, 반 고흐도 그랬고, 이중섭과 김기창도 그랬다.

그림이 삶 속에, 삶과 가까이 있으려면 ‘돈’이 아닌 그림 그 자체로 보고 만나야 한다. 그림을 돈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재산이나 과시용이 된다. 그때는 예술적 취향도, 그림에 담긴 시간과 감성, 인생과 자연도 의미가 없다. 단지 누구의, 얼마를 주고 산 그림이라는 것이 중요해진다. 벽에 그림을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인기와 돈을 걸어놓는 셈이다. 그것은 문화적 향유도, 그림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언젠가 프랑스 칸 영화제 취재를 갔다가 근처 산언덕에 위치한 생폴드방스란 작은 마을에 간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예술의 마을’로 좁은 길, 오밀조밀한 집, 자그마한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과 카페들이 자리했다. 화가 샤갈이 너무나 좋아했다는 프랑스 남부 산속 작은 마을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났다. 비록 이름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열심히 자기 색깔의 그림을 그렸다.

흥미로웠던 점은 많은 화가들이 있었지만 비슷비슷한 그림이나 형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그림을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정말 자기 그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자랑스럽게, 행복하게 그림을 팔았다.

그곳에서 산 작은 그림,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강렬한 ‘노아의 홍수’는 아직도 집에 걸려 있다. 물론 그것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더구나 그가 얼마나 유명한 화가인지도 알지 못한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 그림을 보면서 그날의 여행과 그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뿐이다. 그 순간 역시 마음속에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림이란 이런 것이다.

 

 거실로 그림을 초대하는 즐거움

▶ 밤 거리 빛축제가 열리고 있는 부산 중구 남포동 거리에서 화가들이 행인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작고 소박한 그림의 융성
한국 미술의 경쟁력 높이는 일

누구나 맘에 드는 그림 한두 점은 가지고 있다. 벽에 걸어두고 이따금 보면서 가슴에 아름다움, 상상력, 그리움, 추억, 감동을 되살린다. 그래서 그림은 정지된 화면이지만 늘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다. 그 그림이 자작이든, 꼬마의 것이든, 이름 모를 화가의 것이든, 유명 화가의 복제품이든 상관없다. 어느 집 벽에 걸려 있는, 그 집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그린 꼬불꼬불한 그림이 그 부모들에게는 수천만 원 하는 유명화가의 그림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내 집에도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다. ‘노아의 홍수’와 추상미술을 하신, 지금은 돌아가신 친척의 그림과 그림을 구입할 때도 지금도 유명하지 않은 어느 화가의 판화 한 점이다. 모두 10호 이하의 작은 것들로, 판화는 10여 년 전 어느 전시회에서 물고기의 모습이 너무 맘에 들어 몇십만 원에 샀다. 지금 내 집에 있는 작품은 물론 그 화가의 다른 작품이나 새 작품의 가격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무심히 작품을 볼 때 생명의 소중함을 느껴서 좋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하는 한 화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그림의 아름다움은 이름이나 크기에 있지 않다. 희귀성에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니면 이제 시작이지만 혼신을 다해, 작지만 시간과 공간과 느낌과 상상력과 영감을 담는 사람들의 진실한 마음에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화가들이 무수히 많다. 또 앞으로도 그런 마음과 열정으로 그림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지금 당장 인사동에 있는 화랑이나 전국 미술관에 한번 가보라.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 나의 느낌과 맞닿는 것, 나의 삶과 추억을 새긴 것을 하나 골라 오래오래 걸어두고 보라. 그것이 문화와 예술이 있는 삶이고, 그림이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인터넷 미술 경매시장도 풍성하고 다양하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우리나라 미술 시장 규모는 아직도 빈약하다. 일 년에 3500억 원(2014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유명화가들의 작품만 일부 층에서, 다분히 투자나 과시용으로 거래되고 있다. 미술이 있는 삶, 미술 융성을 위해서는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삶의 시작이 그렇듯 작고 소박한 그림들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침체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미술 시장과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미래의 화가들의 꿈을 키워주고, 한국 미술의 경쟁력까지 높여주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닌가.

그림은 ‘시(詩)’다. 한 영국 부호가 허영심으로 무조건 사들인 값비싼 그림들을 자랑하면서 기증할 곳을 묻자, 조지 버나드 쇼가 “맹아학교에 기증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좋은 그림은 맛있는 요리와 같다고 한 사람도 있다. 재료가 무엇이든, 무엇을 그리든 그리는 사람의 마음과 손길에서 아름다움과 향기가 나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실로 그림을 초대하는 즐거움

 

·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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