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명성황후 시해의 비극현장, 장안당 뒤뜰

▶ 건청궁
경복궁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건청궁(乾淸宮)이 있습니다. 건청궁은 화려한 단청이나 요란한 잡상 등의 장식이 없는 소박한 건물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실 용도로 지었기 때문이지요.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난 시기부터 을미사변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가기 전까지 건청궁을 내전처럼 사용했습니다.
고종은 12세 때 임금의 자리에 올라 68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의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갖은 애를 썼습니다. 고종 때 일어난 사건들은 간추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그중 가장 크고 치명적인 사건인 갑오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은 모두 고종이 건청궁에서 정무를 보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건청궁 정문으로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그 마당의 왼쪽에는 장안당(長安堂)이, 오른쪽에는 곤녕합(坤寧閤)이 있습니다. 장안당은 고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같은 건물입니다. 장안당 앞쪽에 있는 누마루는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입니다. ‘추수부용’은 ‘가을 물속의 연꽃’으로 고고한 시인을 비유한 말입니다. 곤녕합은 안채와도 같은 곳입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곳으로 우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바로 명성황후가 일본 무사들에 의해 살해당한 곳이지요.
1895년 8월 20일, 폭도들은 정말 잔인하고 무도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지요.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답니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들의 칼등에 맞아 실신했으며,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봐야만 했습니다.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폭도들은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가슴을 짓밟고 칼로 마구 찔러댔답니다. 그러곤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녹산(鹿山)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습니다.
건청궁의 정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으로 인유문(麟遊門)이 보입니다. 인유문 밖에는 낮은 언덕이 있는데 그것이 ‘녹산’입니다. ‘인유’는 기린이라는 상서로운 동물이 논다는 뜻이지만, 인유문 밖 녹산은 명성황후의 시신이 훼손되었던 곳입니다.
지금 녹산에는 동궁 자선당의 기단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전시된 돌들은 일본인에 의해 해체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온 자선당의 유구(遺構)인데, ‘유구’란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 따위를 알 수 있는 잔존물을 말합니다. 도쿄 어느 호텔 앞마당에 지어졌던 건물은 관동대지진 때 불타 없어지고,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기단석만이 1995년에 돌아왔지요. 그런데 이 돌들은 화재 때 삭아버렸기 때문에 자선당 복원 작업에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 2 건청궁은 경복궁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한 단청이나 요란한 잡상 등의 장식이 없는 소박한 건
물들로,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실 용도로 지었다.
3 향원지 서북쪽 모퉁이에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 있다.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샘
물이 연못 수면 위로 바로 떨어지면 물고기들이 파문에 놀랄 것을 우려해 돌확으로 물의 속도를 늦추도록 세
심하게 설계했다.
4 명성황후의 시신이 훼손되었던 곳 녹산에는 동궁 자선당의 기단석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돌들은
일본인에 의해 해체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온 자선당의 유구(遺構)다. ‘유구’란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
따위를 알 수 있는 잔존물을 말한다.
5 향원지와 향원정. 향원정은 인공 섬에 세워진 육각의 중층 정자로, 1층이 온돌방이라 겨울에도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윤상구
건청궁 정문 앞에는 향원지(香遠池)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향원지에 걸린 다리 취향교(醉香橋)는 원래 건청궁 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다리는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다리를 다시 놓던 1953년에는 건청궁이 없었으므로 그냥 남쪽에 만든 것입니다. 향원정(香遠亭)은 인공 섬에 세워진 정자입니다. 육각의 중층 정자로 1층은 온돌방, 2층에는 마루방을 만든 덕분에 겨울에도 향원정에서 풍광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향원지 서북쪽 모퉁이에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 있습니다.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지요. 샘물은 홈통을 따라 내려와 표주박 같은 돌확(지름 41cm, 깊이 15cm)에 잠깐 머물게 됩니다. 돌확에서 돌면서 속도가 늦춰진 물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판석 밑으로 들어가 기역자로 꺾인 후 수면 아래서 연못물과 섞이게 됩니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로 만든 이유는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나가야 명당수라는 개념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수면 아래로 내려가 섞이게 한 것은 연못의 파문을 막기 위해서고요. 물이 수면 위로 바로 떨어지면 연못에 사는 물고기들이 찬물과 파문에 놀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열상진원에서 건청궁 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전기 발상지 비석이 있습니다. 당시 전기를 켜기 위한 모든 시설을 미국 공사에게 부탁하여 에디슨 전기회사에 발주했습니다. 에디슨 전기회사는 장비와 함께 기사를 보내 향원정 연못물을 끌어들이고 석탄으로 발전기를 돌리게 했습니다. 1887년 3월 6일 저녁에 경복궁에서 점등식을 가졌습니다. 물을 끌어들여 발전을 했다 하여 전깃불을 ‘물불’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또 잦은 고장으로 깜빡거리는 일이 많아 ‘건달불’이라고도 불렀답니다.
그런데 전깃불의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밤에도 불이 훤하니 궁녀들은 불면증을 호소하고, 냉각수가 향원지에 흘러들어 물고기가 떼죽음을 한 것입니다. 모든 시설이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직접 보내온 최고급인 데다 발전기를 돌리는 운영비도 많이 들어 증어망국(蒸魚亡國), 즉 ‘물고기가 삶아지고 나라가 망한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고종이 이곳 건청궁에 기거했을 때는 이래저래 망국의 그림자가 궁궐 주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떠난 후 경복궁은 더 이상 궁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왕실은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요. 고종이 건청궁을 떠날 때 이미 조선 왕조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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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