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고려 광종(光宗 : 925~975, 재위 949~975)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키워드는 과거제도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시험에 의해 관리를 뽑는 시스템을 정착시킨 인물로 기억된다. 과거제도를 실시한 가장 큰 이유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배출해 왕권을 확립하고 호족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의 초석을 다진 광종의 일대기를 다뤘던 KBS 1TV 드라마 <제국의 아침>.
태조 왕건의 호족 통합 정책은 고려 건국에 중요한 요소이긴 했지만 그의 사후 치열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왕건이 재위 26년 만인 943년에 세상을 떠나자 호족 연합정권에 위기가 찾아왔다. 왕위를 계승한 혜종이 재위 3년 만에 병사하자 정종이 왕위를 이었지만, 역시 재위 4년 만에 사망했다. 특히 혜종과 정종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외척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 4대 광종이었다. 광종은 정종의 아우로, 결과적으로 왕건은 고려의 2, 3, 4대 왕 모두의 아버지가 되는 특이한 이력을 지니게 됐다. 치열한 왕위 계승의 최종 승리자가 된 광종은 27년간 집권하면서 호족들에게 휘둘리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광종은 즉위하자마자 '광덕'이란 연호 대신 '광순'이라는 중국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후주와 연대를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이에 후주에서는 956년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사신 일행 중 한 인물이 쌍기(雙冀)였다. 쌍기의 재능을 알아본 광종은 그를 귀화시켰고, 그와의 만남 이후 본격적으로 호족 제거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쌍기는 귀화인 출신으로 우리 역사에 이름을 선명히 남긴 거의 최초 인물이었다.
년 실시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해 양민이었던 자를 해방시킨 제도로 귀족의 사유재산을 박탈하는 획기적 조치였다. 당시 귀족들이 소유한 노비들 중엔 전쟁 포로나 가난한 양민 출신이 많았는데, 광종은 이들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년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시(詩)와 부(賦), 송(頌), 시무책(時務策) 등을 시험 과목으로 한 과거제도의 결과 유교 교양을 쌓은 문반(文班)이 나타나 종전의 무반(武班)과 함께 양반 관료제도가 확립되는 토대가 마련됐다. 광종은 관료제도의 정비를 위해 백관의 공복(公服)을 만들어 등급에 따라 자주색, 적갈색, 주홍색, 초록색의 옷을 입게 했다. 또한 당나라 태종이 정치의 요체를 정리한 <정관정요>를 적극 참조해 고려의 정치에 반영했다. 승려 우대 정책도 실시했는데, 고승들을 왕사(王師)나 국사(國師)로 삼는 제도 역시 광종 대부터 시작됐다.
광종의 개혁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개성을 황도(皇都)로, 서경을 서도(西都)로 삼아 당당한 황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한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 광종 대에 단행된 정치 개혁은 경종과 성종으로 이어졌고, 고려라는 국가의 기틀이 체계적으로 마련됐다. 10여 년 전 광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 제목을 <제국의 아침>이라 한 것은 광종 시대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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