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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서로공감] 에어컨 바람이 정치 판도를 바꿨다고?

에어컨이 영화 제작 관행을 바꿨다면 믿어질까. 나아가 미국 정치 판도를 바꿨다면? 당연히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다. 적어도 이 책의 설명을 읽고 나면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1902년 미국 브루클린의 인쇄공장에서 일하던 윌리스 캐리어라는 젊은 공학자가 공기 중 습기를 제거하는 장치를 개발한다. 습한 여름에 잉크가 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에어컨의 시작이다. 1925년 여름 뉴욕 맨해튼의 한 극장에서 선보인 이 발명품 덕에 영화 제작 풍토가 바뀌었단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숨이 막힐 듯 후텁지근했던 영화관이 쾌적하게 변하면서 대작 영화 개봉이 가능해진 것이다. 요즘엔 방학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박을 노린 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되는 것은 에어컨이 없던 시절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다.

1940년대 가정용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미국에서 인구 이동이 벌어진다. 열대의 습기와 따가운 사막 기후에서도 쾌적한 삶이 가능해지자 북부 사람들이 대거 남부와 남서부의 이른바 '선 벨트'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플로리다 주의 경우 1920년대 100만 명에 불과하던 주민이 반세기 만에 1000만 명이 넘었을 정도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스티브 존슨 지음 | 강주헌 옮김 | 프런티어 | 323쪽 | 1만6000원

이에 따라 정치 지형도 바뀐다. 1940년부터 1980년 사이 남부지역 대통령 선거인단 수는 29명이 증가한 반면 북동부와 중서부에선 31명이 줄었다. 또 민주당 아성이었던 남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은퇴자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공화당 우세로 바뀌었다.

그 결과 20세기 전반에는 남부 출신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두 명에 불과했지만, 1952년부터 대통령이나 부통령 중 한 명은 선 벨트 지역 출신이 당선되는 것이 전통처럼 굳어졌다. 그러니 텍사스 주 출신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을 주도한 것을 두고 에어컨 바람이 조금은 들어갔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인의 삶에 깃든 기술 문명의 궤적을 보여주는 이 책은 뉴스위크가 선정한 '인터넷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50인'에 꼽힌 과학 저널리스트가 썼다.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 6개 분야의 기술 발달이 이뤄진 과정을 살핀 일종의 과학사 책이다.

책의 핵심은 '벌새 효과(Hummingbird Effect)'. 벌새 효과는 꽃식물의 번식 전략이 벌새가 다른 조류들과 달리 비행 정지술을 개발하도록 유도했다는 사례를 가리키는 말로, 의도하지 않은 파생 효과를 뜻한다. 예를 들면 수돗물을 소독하는 염소 처리법 덕분에 대중목욕탕과 수영장이 생겼고, 공중 수영장이 생기면서 여성들이 점차 몸을 드러내는 수영복을 입게 된 끝에 비키니가 만들어졌단다.

게다가 청결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해 오늘날과 같은 컴퓨터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거란 대목까지 이어지면 현대의 기술 문명이 얼마나 우연의 연속에 빚지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사소한 우연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핀볼 효과>(제임스 버크 지음, 궁리)나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연결 짓는 통찰을 담은 <생각의 융합>(김경집 지음, 더숲)과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과학사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지음, 까치) 등이 재미와 깊이를 갖춘 책들이다.


·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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