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고려시대 국왕의 호칭에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등 ‘충(忠)’자 항렬의 왕들이 연속한 시대 가 있다. 이는 고려가 100여 년 가까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 황실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왕의 시호에 ‘충’ 자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충’ 자 묘호를 없애기 시작한 왕이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으로서 이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민왕
공민왕 역시 왕자 시절엔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 들어가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 혼인해 원나라 황 제의 사위가 됐다. 그러나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후엔 바로 호복(胡服 : 몽골복)을 벗고, 변발을 폐지하 며, 고려가 자주국임을 선언했다.
왕위에 오른 후엔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했으며, 내정간섭 기관 인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그리고 고려의 공녀(貢女) 출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의 제2 황 후가 된 기황후의 오빠이자 친원파의 핵심이었던 기철 일파를 숙청해 왕권을 확립했다.
원나라의 직속령 이었던 함경도 영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차지해 잃어버린 영토도 수복했다. 영흥 지방 수복에 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큰 활약을 했으며, 이성계가 신흥 무장으로 성장하는 데 기반이 됐다.
반원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세력이 교체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도 큰 몫을 했다. 공민왕 재위 기간인 1368년 주원장이 금릉(남경)을 거점으로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몰아내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됐던 것이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 세력도 만주까지 이르지 못하자 1369년부터는 국경의 요지에 만호를 배치하고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로 삼아 동녕부를 정벌하기도 했다.
공민왕은 대내 정책에서도 원나라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했던 권문세족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성 균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인 신흥 사대부를 양성했다. 이색을 중심으로 그 문하에서 학문을 배 운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이 대표적이다.
권문세족을 제거하는 과정에선 미천한 출신의 승려 신돈을 활용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개혁의 전도사로 삼으면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권 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조사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 정책을 펼쳤다.
백성들의 적극적 지지 속에서 행해지던 공민왕의 반원 자주화 정책과 내정 개혁은 점차 보수 세력과 친원파의 반발 속에서 동력을 잃어갔다. 특히 왕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노국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숙청 이후 공민왕은 딴사람처럼 변해갔다. 미소년 집단인 자제위(子弟衛)를 키웠으나 결국엔 1374년 이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혼란한 정국에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을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인임이 권력을 잡았고 그의 세도는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인임이 권력을 잡은 후 고려는 친원 정책으로 회귀했고,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단절됐다. 그러나 공민왕이 뿌린 개혁의 토양 위에서 성장한 정도전 등 신흥 사대부들과 이성계 등 신흥 무장들이 조선 건 국의 주체 세력이 됐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 정책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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