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역사적 공간을 꼽으라면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이 궁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왕조 자체를 대표하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종묘와 사직을 버리다’라는 말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던 의물(儀物))를 봉안하고 국가적인 제사를 지낸 곳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유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사람은 영혼인 혼(魂)과 육신인 백(魄)이 결합된 존재이고, 죽음이란 혼과 백이 분리돼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죽은 조상의 혼을 모시는 묘(廟)를 세우고 백(육신)을 땅에 모시는 묘(墓)를 만들어 조상을 숭배하도록 했다.

▷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 사직단.
종묘와 사직은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시대엔 왕가에서 시행하는 제사를 그 격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눴는데, 종묘와 사직은 모두 대사에 속했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것이었다.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는 엄정한 의식 절차에 따라 거행됐으며, 제사엔 반드시 음악이 연주됐다. 종묘제례악과 사직제례악은 현재까지 이어져 종묘와 사직의 대제에 연주돼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1342~1398)은 저술 <조선경국전>에서 “왕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고 나서 반드시 종묘를 세워 조상을 받들어 모신다. 이것은 자기의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매우 큰 도이다”라고 하여 종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사직에 대해선 “사는 토신(土神)이며 직은 곡신(穀神)이다. 사람이란 토지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자에서 제후까지 백성을 가진 자는 모두 사직을 설치하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을 위하여 행복을 가져오는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전통시대 농업의 중요성과 민생 안정을 위한 왕의 책무를 상징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묘와 사직은 충과 효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의 핵심이 농축된 제도다. 따라서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왕조에선 처음 세울 때부터 각별한 공력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 1392년 10월 9일의 기록에 “태묘조성도감(太廟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태묘는 곧 종묘로서, 조선 건국 직후부터 종묘 조성사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1395년 9월 종묘가 완공되자 태조는 개경에 있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겨와 본격적으로 종묘를 정비했다.
1395년 1월엔 사직단 조성 공사가 시작돼 한양의 서부 인달방(仁達坊·현재의 종로구 사직동)에 조성됐다. 현재도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종묘와 사직은 최고의 존엄을 지닌 조선 왕실의 상징 공간이다.
글·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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