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추리소설은 진화한다. 에드거 앨런 포가 〈모르그가의 살인〉으로 추리소설을 선보인 이래 한동안은 독자의 허를 찌르는 두뇌 싸움이 추리소설의 본령이었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 등 명탐정들이 빛나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코믹물(〈아기는 프로페셔널〉)이 있는가 하면, 따뜻한 추리물(〈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도 있고 심지어 눈물을 자아내는 범죄소설(〈악인〉)도 있다. 어두운 시대상을 그린 하드보일드 소설, 뛰어난 무력을 갖춘 스릴러에서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소설까지 다양한 형태의 소설이 독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중에는 당연히 주인공도 다양해져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전형적인 탐정이나 형사만이 아니라 의사, 선생님,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이 등장하며 때로는 악인이 주역으로 나오기도 한다.
주인공이 누구든, 주제가 무엇이든 추리소설의 미덕은 재미다.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다가 마지막에 반전이 이뤄지면서 '악인은 지옥으로'라는 구조가 독자를 끌어들인다. 한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기에 책 읽는 재미를 알려주기 위해 자주 권해지는 장르다.
이야기는 조 탤버트라는 미네소타대학 학생이 힐뷰 매너란 요양원을 방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탤버트는 대학 영어 수업 과제로 낯선 사람을 인터뷰하기 위해 요양원을 찾은 것. 거기서 칼 아이버슨이라는,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노인을 소개받는다. 한데 아이버슨은 30년 전 열네 살짜리 여자애를 강간하고 살해한 죄로 처벌을 받은 범죄자. 죽음을 앞두고 요양원으로 옮겨진 처지다.
'남은 삶을 시간 단위로 셀 수 있는' 아이버슨은 처음엔 탤버트와의 대화를 거부하다가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임종 시 진술'을 시작한다. 일이 커지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버슨의 이야기를 듣고, 재판 기록을 조사하면서 탤버트는 수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리소설치고는 잔잔하다. 막판 반전은 있지만 교묘한 트릭도 없고, 피 튀기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완력이 강하거나 머리가 뛰어나지도 않다.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이란 이야기다. 한데 인간적 면모와 문학적 향취가 소설의 흡인력을 보장한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탤버트와 아이버슨 외에 탤버트의 동생 제러미, 옆방의 라일라 내시, 아이버슨의 전우 버질 등이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들 모두는 약점과 상처를 가졌다.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와 자폐증이 있는 동생을 피해 대학으로 '탈출'한 탤버트, 문란한 과거를 가진 내시, 베트남전쟁의 기억에 시달리는 아이버슨과 버질의 이야기가 한 편의 잘 짜인 태피스트리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언론정보학을 전공한 뒤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조계에서 일했다는 작가의 데뷔작인데, 추리소설의 미덕과 품격을 두루 갖춘 작품이다. 이 가을, 진지한 책을 멀리하는 이들도 독서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 강동혁 옮김 | 들녘 | 424쪽 | 1만4000원
글 · 김성희(북칼럼니스트)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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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