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인생을 뒤흔드는 선택의 순간’이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대학을 선택하는 순간, 전공을 선택하는 순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는 순간, 꿈을 선택하는 순간 등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들이 의외로 많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누군가의 연락을 받지 못하던 순간, 힘들다는 핑계로 누군가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하던 순간, 어렵다는 이유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던 순간. 그 모든 ‘핑계를 대고 싶은 순간들’에 나 자신의 결정적인 요소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런 깨달음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 자잘해 보이던, 심지어 하찮아 보이던 작은 선택들이 천천히 만들어 온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나를 만든 것은 어떤 ‘굵직굵직한 순간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인식하게 된다.
예컨대 죽마고우라고 믿었던 친구와 멀어지는 순간이 그렇다. 친구와 멀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절교’ 같은 엄청난 사건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처럼 희미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와 멀어진다. 아주 작다고 믿었던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구렁텅이를 만들었다고 깨달았을 때, 돌아보면 어느 새 친구와의 연락이 끊겨 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립지만 연락하기도 민망한 사이가 되어버리곤 한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열정 또한 시나브로 식어간다.
피아노가 분신이라 생각했던 시간이 20년도 넘었지만, 이제는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면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손가락이 굳어져 버린 것은 물론이다. 그저 나만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는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는 내 실력이 별로겠지” 하는 자기검열 때문에 피아노와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피아노’가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도자기에 새겨진 연필자국처럼 흐릿한 아주 작은 균열이,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결국은 도자기가 깨져 버리듯이. 그렇게 피아노를 향한 내 순수한 열정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자리 잡기 전에 먼저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멀어지기 전에 더욱 열정적으로 대상에 몰입해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도 그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작은 선택들’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내가 언제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는 없다.
언젠가부터 매일 글을 읽고, 매일 글을 썼다. 외로울 때도, 힘겨울 때도, 절망적일 때도, 슬픔의 늪에 빠졌을 때도, 글쓰기는 내 마지막 남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20여 년을 보내자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거창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내 등을 밀어붙이는 영혼의 바람이었다.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이렇듯 엄청난 선택들, 대단한 선택들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습관들, 아주 하찮은 선택들이 우리 인생의 커다란 그림을 천천히 만들어간다.
그러니 오늘도 늦지 않았다. 아주 작지만, 아주 괜찮은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지극히 사소하지만, 매일매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소중한 대상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소한 선택을 통해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열쇠를 찾는 길이 아닐까.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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