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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발자국’으로 사유하는 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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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산책길, 머리가 아닌 발자국이 주인이 되는 시간. 늘 앉아만 있는 삶은 실제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다. 걸으면서 도달한 사고만이 가치가 있다.” (니체, <우상의 황혼> 중에서)

머릿속이 난마처럼 얽혀버린 시간, 어떤 위로로도 불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시간. 그런 시간에는 무작정 산책을 나간다. 대낮의 산책도 좋지만, 가장 매혹적인 산책은 역시 한밤중에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선이 보이지 않고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희미한 실루엣이나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더 잘 보이는 시간.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필요 없이 그저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 그런 한가로운 밤 산책의 여유는 의외로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감의 실마리가 영 풀리지 않을 때, 차라리 살짝 포기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산책을 나가면 신기하게도 돌아오는 골목 어귀에서 싱그러운 착상이 떠오르곤 한다. 밤 산책은 목적이 없을수록 좋다. 쓰레기 봉투를 사러 나간다든지, 비누나 치약을 사러 나가는 정도의 가벼운 목적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좋다. 별다른 목적 없는 정처없는 발걸음은 우리에게 ‘머리’가 아닌 ‘발자국’으로 사유하는 법을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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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실성을 체크하는 방법도 ‘그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싶은가’로 판별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로 전 세계 영화팬들을 열광케 한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천재성도 바로 이 은밀한 걷기 예찬에 있는 것 같다.

셀린(줄리 델피)은 첫 만남 이후 9년 만에 제시(에단 호크)를 만나 고백한다. 유럽 횡단열차에서 충동적으로 너를 따라 내려 빈의 땅을 밟는 순간 너와 함께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고. 연애가 시작되는 순간은 “우리 사귀자”고 청유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돌발적으로 첫키스를 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수줍게 상대방의 손을 잡는 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과의 합의로 시작되는 연애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사람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싶어지는 순간, 와글거리는 인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쳐내 버리고 다만 그 사람과 단둘이서 걷고 싶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20년에 걸쳐 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다만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연애의 욕망을 넘어선 사랑의 뜨거운 본질이 아닐까. <비포 미드나잇>에는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우리 단둘이 이렇게 걸어본 것이 얼마 만이지?”

늘 육아와 가사노동에 쫓겨다니느라 단둘이 걸어다닐 여유조차 없어져버렸던 셀린과 제시의 삶. 그들은 ‘결혼’에 충실하느라 문득 ‘사랑’에 소홀해져 버린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일거리를 싸안고 씨름하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포기하는 마음으로 밤 산책을 나갔다. 밤 산책의 매력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마음속의 화두들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 글은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그 강의는 이렇게 진행해 보면 어떨까. 잠들어 있던 내 ‘산책자의 발’은 ‘고집스레 앉아만 있던 나의 머리’를 향해 자꾸만 낯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일에 찌들지 않고, 출근길의 혼잡에 시달리지 않고, 한가로이 밤 산책의 묘미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천국의 페스티벌이 시작되는 순간은 바로 이때구나.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도, 휴대폰가게에서 호객행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 풀벌레 소리와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가 오롯이 제 목소리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순간.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평범한 동네가 천상의 놀이터가 되는 순간이다.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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