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각종 숫자를 통해 증명하기를 요구받을 때,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왜 주소와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와 신용카드번호를 내밀어야 할까. 존재의 자기증명을 숫자로 요구받는 생물은 지구상에서 인간뿐이지 않을까. 입학할 때, 입주할 때, 입사할 때, 입국할 때, 그 모든 ‘출입’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뚜렷한 자기증명을 요구받는다. 평소에는 내가 누구인지 심각하게 묻지 않다가도 어떤 경계나 문턱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갑자기 생각해 내야 한다.
예컨대 신체검사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이 나와 함께 더불어 잘 살아오던 내 몸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것이다. 내 키가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내 몸무게가 평균 이상이거나 이하라든지, 시력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바로 그 ‘평균’이라는 가상의 표준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기대 이하로, 또는 기대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진기한 풍경이다. 신체검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앉은키를 잴 때다. 누군가의 앉은키가 전체 신장에 비해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나오면 아이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고, 앉은키가 좀 큰 아이는 울상이 되거나 아이들을 잡아먹을 듯이 째려본다. 생활기록부에 신체 사이즈를 손으로 적어야 했던 어린 시절. 선생님이 신체 사이즈를 부르면 서기를 맡은 한 아이가 열심히 받아 적는 기이한 풍경을 초·중·고교 12년 동안 해마다 빠지지 않고 목격해야 했다. 나도 서기를 맡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남들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본의 아니게 엿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 이런 복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의례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여권을 검사할 때, 신분증을 꺼내야 할 때, 병원에 가서 치료하거나 건강검진을 받을 때, 이력서를 쓰거나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나인데, 왜 내가 나를 나라고 증명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만든 기준이 아니라 남이 만든 기준으로 나를 평가당해야 하는 순간의 수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덫, 그것은 이름이다. 나는 내 이름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선생님들은 주로 이름이 가장 특이한 아이를 골라 대답하기 곤란한 걸 물어보거나 시키곤 했다.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이 ‘첫번째 질문’의 단골손님이었다. 이름 때문에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은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너는 네 이름과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내 특별한 이름에 비해 나는 너무 특별하지 못한 아이로구나, 라고 알아들었다. 내 이름은 훌륭한데, 나는 정작 그 이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 같았다.
어른이 되면 끝날 줄 알았다. 이 지겨운 ‘나의 존재증명’ 시간이. 하지만 어른이 되자 더 복잡하고 미묘한 자기증명의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니, 어딜 가나 멋들어진 ‘자기소개’를 요구했다. 어쩌면 내가 취업에 도전하지 못한 것도 그 진땀 빼는 자기소개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을 벗어나 진짜 어른이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이제 ‘명함’을 요구했다.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은 없지만 고정된 직장이 없는 나는 명함을 요구받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증명하라’는 각종 명령어에 무뎌지려고 애쓰는 중이다. 내가 쓰는 글, 내가 만드는 인연,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곧 ‘나’를 천천히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성격은 아직도 제조 중이고, 나의 재능 또한 아직도 연마 중이며, 나의 인연 또한 늘 새롭게 생성 중이다. 나는 어떤 수치로도, 어떤 증명서로도 타인의 인생을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내가 누구인가를 뜨겁게 깨닫는 순간은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타인의 규정에 저항하고자 할 때임을 알기 때문이다.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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