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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찬제의 문화이야기]너도 약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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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어느덧 연말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에 붙어 있는 시간은 참으로 험악하다. 분명히 31일까지 허용된 12월이건만, 13일보다 짧은 것 같은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쫓기기 때문이리라. 새해를 맞으며 계획했던 많은 일이 아직도 저렇게 밀려 있는데, 벌써 시간은 존재를 밀어내려 한다. 아직 맡은 바 대사를 다 소화하지 못했는데, 서둘러 퇴장해야 하는 단막극의 배우처럼,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그 무대에서 자기 존재증명을 하고 싶었는데, 본론을 꺼내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면 참으로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극 무대에 서본 적은 없지만, 학회 발표장에서 그런 느낌에 쫓긴 적이 더러 있다. 여러 발표자가 순서대로 빡빡하게 기다리고 있는 학회에서 제한시간은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된다. 자칫 잘못하면 핵심 논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밀려나고 만다. 특히 국제학술대회는 더 그렇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데,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처지에서는 퍽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머지는 발표자료를 참고해 달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주어진 시간에 설득하지 못했으면 의미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좀 억울한 기분이 들어도, 시간은 결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포기하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애써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 때 다음에는, 내년에는 꼭, 그런 심정으로 미루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러면서 송년회 자리로 서둘러 달려가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자기합리화를 잊으려고, 허망하게 취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 이런 구절을 만나면 어제 내가 왜 그렇게 서둘러 슬픈 암장을 시도했을까, 후회된다. “인생이란 언제라도 지금부터야. 누구에게나 아침은 반드시 찾아온다.”

시바다 도요의 시집 <약해지지 마>의 후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실 이 문장은 따지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가 아흔을 넘기고 시를 끄적거리기 시작해 백수(白壽) 즈음에 펴낸 시집에 들어 있는 구절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는 이런저런 고난과 신산한 역경을 거치며 한 세기를 살았다. 전쟁도 경험했고 대지진도 겪었다. 가정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고 건강상의 위기도 있었다. 늙어서 취미로 일본 무용을 했는데, 허리가 아파 그마저 할 수 없게 됐다. 인생의 막장인 듯싶었는데, 아들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아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침대에 누워서건 TV를 볼 때건, 보이는 장면에 지난 인생을 반추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리듬을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자기 존재증명의 시편들을 한 편, 한 편 지어 나간다.

물론 그의 시는 문학성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전위적인 시편들도 아니다. 시대의 예민한 환부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예표적인 증후를 다루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울림이 있다. 그의 전 생애가 담겨 있는 까닭이다. 온몸으로 쓴 것 같은 시라서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 한숨짓지 마 // 햇살과 산들바람은 / 한쪽 편만 들지 않아 //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 나도 괴로운 일 / 많았지만 / 살아 있어 좋았어 // 너도 약해지지 마”(시 <약해지지 마> 전문).

햇살과 산들바람이 한쪽 편만 들지 않고, 평등하게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 괴롭고 불행하더라도 한숨짓지 말고 약해지지 말라며, 위로하고 격려한다. 이 위로는 자기 위로이자 남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위로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과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한 가지(自利利他同事)’라고 했던 보살행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가 아닐까 싶다. 또 한 해를 아쉽게 보내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해지지 말라고 위로를 건네던 백수 시인의 권면을 떠올린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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