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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마음뿐인 ‘복수’, 약소국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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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4월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의 선진문화를 경험했던 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에게 돌아갔다.

1649년 왕이 된 효종은 인조가 자신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637년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복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왕 인조와 집권 서인의 복수설치(復雪恥 : 복수하여 치욕을 씻음)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즉위 후 북벌(北伐)을 국시(國是)로 삼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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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김자점 등 친청파를 제거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 척화파를 등용하였다. 특히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조정에 불러들여 북벌의 이념을 전파할 사명을 맡겼다. 북벌을 위한 군비증강정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중앙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고, 북벌 추진의 중심기구로 어영청을 설치한 후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이완은 이후에도 관례적으로 공신이나 왕실의 친인척이 임명되었던 야전사령관인 훈련대장에 전격 발탁되어 현종 때까지 16년 동안 훈련대장을 역임하였다.

효종은 병자호란 때 참전 경험이 있고 평안도·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보여준 이완의 능력과 친명반청적인 성향을 북벌 추진에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완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천한 대표적인 장수였으며, 자신이 죽으면 효종의 무덤 인근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기도 하는 등 철저한 효종의 사람이었다.

현재 이완의 무덤은 효종의 무덤인 경기도 여주의 영릉(寧陵) 인근에 있는데, 죽을 때까지 효종과 북벌의 뜻을 함께한 이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외에 효종은 훈련도감과 남한산성의 수비대인 수어청에 대한 군비증강사업, 군량미 확보 등을 통해 북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갔다. 의욕적인 준비에도 불구하고 북벌은 효종의 뜻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전쟁 준비에 지쳐 있었고 전쟁물자 조달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훈련도감군은 모두가 월급을 받는 급료병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었고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청나라의 군사적인 감시도 만만치 않아 성곽의 축성작업도 청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벌’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효종과 신하가 사석에서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효종실록>에 ‘북벌’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효종은 북벌의 실천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게 된다. 청나라의 계속적인 군사력 축소 압박과 내수(內修)에 치중해야 한다는 송시열 등의 의견,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사대부와 백성들의 소극적인 입장 등이 맞물리면서 북벌은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채 꿈으로만 끝난 것이었다.

북벌의 실천을 위해 즉위했고 왕위에 오른 10년 동안 북벌만을 위해 매진했던 왕 효종. 그의 죽음과 함께 ‘중원을 정벌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씻을 것’이라는 북벌의 꿈도 현실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북벌의 사상적 이념은 조선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조선을 명나라의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숙종대에는 궁궐의 후원 깊숙한 곳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신종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여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계속 지켜나갔다. 나아가 이제 중화(中華) 문화의 중심은 조선이 계승했다는 ‘소중화사상’, 나아가 ‘조선중화사상’을 이념화하였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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