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항복의식을 치렀다. 항복의 조건으로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인질이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이하 선양)으로 갔다. 처음 소현세자는 반청(反淸)의 입장에 있었으나, 8년간의 선양생활은 그의 사고를 개방적으로 변화시켰다. 8년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현세자 일행이 선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선양에 도착한 뒤 세자는 새벽에 조선을 향해 문안 인사를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시작으로 서연(書筵)을 열어 시강원 신하들의 강의를 받는 것을 중심으로 일상을 유지해 나갔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황제를 따라나서야 했다. 청의 장수들이나 역관들을 만나 조선인 포로문제, 군사 징발 등 정치적 요구에 응하거나 개인적인 무역 요구를 들어 주는 일도 해야 했다.
소현세자 일행은 선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머물렀고, 5월에 심양관(瀋陽館)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1644년까지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대표부로 활용됐다. 요즘의 선양 주재 대사관의 기능을 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심양관에서 부인인 세자빈 강씨와 힘을 합하여 적극적인 무역활동을 했다. 심양관에는 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있어, 그 운영과 경비는 큰 문제가 되었다.

1641년(인조 19년) 12월 청 황제는 소현세자 측에 심양관에서 농사를 지어 직접 식량을 해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농사는 정착을 의미하므로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한 심양관의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러자 청나라는 조선인 포로들을 직접 속환(贖還)하여 농사를 지으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세자 부부는 신하들의 계속된 반대에도 제안을 받아들였고, 청나라가 준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바탕으로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한인 농군들을 노예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 농군으로 바꿨다. 양식을 마련하고자 시작한 농사는 몇 년 후에 필요량의 세 배가 넘는 곡식을 생산했고, 곡식은 청나라의 것보다 품질이 좋아 청나라 왕족들에게 높은 값에 팔렸다. 당시 선양은 여러 가지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라 조선에서 들여온 물품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세자와 강빈은 1645년 귀국 시 교역의 결과로 축적한 재물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에 대한 인조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친청(親淸)적인 세자가 부담스러웠고, 청나라의 후원으로 소현세자가 왕이 되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아들을 경쟁자로 인식한 것이다.
소현세자가 선양에 머무는 기간은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명나라를 대신하여 청나라가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소현세자는 명나라를 압박하는 정치·군사대국 청나라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바꿔 나갔다. 우리가 힘으로 정벌해야 할 나라가 아니라 청과의 정치·경제·문화 교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의 만남을 통해 적극적으로 서학(西學)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 귀국 시에는 화포, 지도, 천리경 등 서양의 문물을 가지고 왔다.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귀국 후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실록의 기록에서조차 독살의 의혹이 제기된 죽음이었다. 8년간의 선양생활에서 세자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고, 청과 대결의 시대가 아닌 협력의 시대를 구상했다. 북벌의 시대에서 북학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세자의 구상은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여전히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기치 아래 북벌을 시대정신으로 인식했던 인조나 서인 정권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의 끝은 세자의 죽음이었다. 소현세자가 선양에서 경험했던 넓은 세상에 대한 구상은 세자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시대사상으로 대두되는 북학사상의 연원에는 17세기 중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부부가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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