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아들, 이리 와봐. 고무대야 몇 개 준비하면 되겠어?”
70대 중반의 할머니 정 씨는 수십 년째 11월 말이나 12월 초가 되면 김장을 해 왔다.
“고춧가루는 이만큼이면 되겠니? 젓국은? 소금은?”
김장 때면 할머니의 질문은 각각 50대 초반과 40대 후반인 두 아들에게만 쏠린다. 고무장갑을 끼고 같이 일을 거드는 50대와 40대 며느리에게는 답을 요구하는 법이 없다. 며느리는 따돌리고, 아들들만을 신뢰하는 까닭일까?
“젊었을 때부터 보니까, 남자들이 감량을 훨씬 잘해요. 여자들 중에서도 그런 대로 양을 잘 맞추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체로 남자들의 짐작이 더 정확했어요.”
정 씨 할머니는 “감량뿐만 아니라 길도 남자들이 훨씬 잘 찾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정 씨 할머니의 막내 아들인 고 씨는 한때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촬영 때문에 야외 출장이 많은 직업특성상 팀원들과 함께 초행인 시골길을 달려야 할 때가 많았는데, 길을 기막히게 잘 찾곤 했던 때문이다. 이른바 ‘길치’임을 자인하거나 이런 흉을 잡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는 게 보통사람들의 경험칙이다.

평균적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한 지리·공간 감각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연구도 대개 남자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곤 했다. 아울러 남자들의 지리·공간 감각이 우월한 이유로는 수렵·채집 같은 원시 인류의 특성이 유전자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멀리 사냥이나 채집을 나가야 했던 게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던 까닭에 남자들의 지리·공간 감각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한데 최근에 극히 새로운 가설이 제기됐다. 지난 11월 12일 미국 유타대학 연구팀은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2009~2011년 실시한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짝짓기’가 남자들의 지리공간 감각을 발달시킨 주요인이라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농경과 더불어 유목과 채집생활을 하는 아프리카 2개 부족의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더 멀리 더 자주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성이 더 많은 여성과 관계할 수 있었다는 게 유타대학 연구팀의 결론이었다. 요컨대 남자들이 지리·공간 감각을 키워온 데는 자손 번식을 위한 본능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동반경이 넓고 외출이 잦은 아프리카 부족 남성이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여성과 관계해 더 많은 자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남성의 지리·공간 감각이 자손 번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시사점은 구전이나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반경 100리 안쪽에 머물다 세상을 떴다. 일상적인 생활반경을 벗어나 타지를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그나마 그 절대다수는 남자였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타지 출신으로 갑자기 동네에 출현한 남자에 대해 동네 처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묘사됐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능 가운데 자손 번식이 으뜸이라고 가정하면,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이 동네 처녀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생활반경이 한정돼 있던 시절 같은 동네 혹은 마을 사람이라면 유전적으로 서로 가까울 확률이 높다. 반대로 겉보기에는 조건이 비슷해도 외지인이라면 아무래도 유전적 근연성이 멀 가능성이 크다.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유전적으로 비슷하지 않은 남녀 혹은 암수가 만나야 보다 경쟁력 있는 후손을 만들어낼 여지가 풍부하다.
쉬지 않고 먹을 것과 짝을 쫓아야 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활동반경이 크고 활동성이 큰 수컷일수록 후손을 많이 남긴다는 연구도 있다.
물론 현대 인간세상에서 수렵·채취는 더 이상 생계의 주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수컷 특유의 공간감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단정짓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글·김창엽(자유기고가)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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