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가끔 엄마네 집에 갈 때마다 엄마보다 먼저 나를 마중나오는 반가운 존재가 있다. 바로 골목길 쪽으로 조금 삐져나와 있는 엄마의 텃밭이다. 오래된 골목길이라 비좁고 울퉁불퉁하지만 엄마가 가꾸는 텃밭은 동네 사람들에게 작은 오아시스다.
시멘트로 만든 평범한 골목길에 커다란 화분을 세 개 덩그러니 가져다놓고 각종 채소와 꽃과 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봄·여름·가을에 따라 엄마가 기분 내키는 대로 심어놓은 꽃들이 알록달록한 빛깔로 피어나고, 철마다 조금씩 다른 채소들이 엄마의 밥상을 수놓는다. 어린 시절에는 옥상에 올라가 좀 더 널찍한 텃밭을 가꿀 수 있었지만, 이제는 쇠약해진 엄마의 다리가 걱정되어 옥상에 못 올라가시게 했더니 몇년 전부터 골목길에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다. 나도 어릴 적에는 틈만나면 옥상에 올라가 밤에는 별도 바라보고 아침에는 꽃에 물도 주며 삭막한 도시 안에서 나만의 작은 오아시스를 즐겼다. 단발머리 중학생시절 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면 건너편 집 기숙사에서 어린 학생들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주기도 했던 그런 정겨운 골목길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 골목길은 ‘누구의 땅도 아닌 모두의 땅’이었다. 골목길에서 인사를 나누며 ‘동네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서른 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서로의 안부를 잘 알고 있었다. 여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골목길에 돗자리를 펴거나 평상을 내놓고 수박을 잘라 나눠먹거나 부침개를 부쳐가며 막걸리 한 잔씩을 돌려 마시기도 한, 그런 정겨운 골목길. 그곳에는 분쟁이나 다툼이 아니라 나눔과 이해가 있었고, 자기만의 사생활보다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안부를 보살필 줄 아는 이웃들의 따뜻한 오지랖이 있었다. 10년 전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 모두 집에 없었는데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30년도 넘게 우리 가족의 안부를 걱정해 주던 그 아주머니 덕분에 아버지는 응급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넘기실 수가 있었다.
그런 골목길에 요새는 가끔 다툼이 있다고 한다. 엄마의 텃밭을 오래된 동네 사람들은 다 알았고, 가끔씩 텃밭의 채소나 열매를 얻어가거나 어여쁜 꽃들을 보며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이 점점 줄어가던 어느날이었다. 엄마가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들 때문에 자기 집 창문으로 날벌레가 들어온다며 술 취한 아저씨가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가끔은 꽃을 몰래 뽑아가거나 채소를 몰래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조용히 이웃의 핍박을 묵인하시며 오늘도 조금씩 솟아나오는 잡초를 뽑아내시고, 가지를 쳐내시고, 꽃들의 안부를 보살피신다.
가끔은 엄마만큼이나 그 꽃들과 나뭇가지들, 그 여린 풀잎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 텃밭이 건재하는 한 엄마 아빠가 건강하게 살아계실 것 같은, 불합리하지만 따뜻한 믿음이 생겼다. 그 텃밭이 아직 남아 있어서 멋대가리 없는 시멘트와 보도블록으로 울퉁불퉁한 우리집 옛 골목길은 ‘딸부잣집 여울이네’의 아련한 향수를 간직할 수 있었다. 꽃도 이파리도 찾아볼 수 없는 겨울에조차 텃밭의 존재감은 막중하다. 겨울에는 함박눈이 내려 말라붙은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모습 또한 사랑스럽다. 엄마는 봄·여름·가을·겨울을 그렇게 천변만화하게 변해가는 풀과 꽃과 나무와 채소들을 바라보며 이제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느라 자주 보기 힘들어진 세 딸들을 기다리신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나는 몇 번이나 화분 가꾸기를 시도했지만, 내 불찰과 게으름 때문에 꽃들은 모두 시들어 죽고 말았다. 이제는 화분이 생길 때마다 엄마네 텃밭에 갖다 놓아야겠다.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골목길의 텃밭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눈길과 좀 더 많은 햇살의 따스함을 들이마시며, 그 옛날 골목길의 이웃들을 향한 그리움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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