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제주도 지도를 쫙 펼쳐놓고 수많은 봉긋한 것을 들여다본다. 산·뫼·봉·악·메·동산·올·오름…. 오름은 조그마한 산체를 말하는 제주어다. 그러니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도의 모든 봉긋한 것은 오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악산도, 붉은오름도, 염통뫼도 모두 오름이다.
제주시의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따르면 산방산·단산 같은 ‘산’은 뫼의 한자 표기다. 다랑쉬오름·거문오름 같은 ‘오름’은 제주어 그대로 오름이다. 삼각봉·왕관봉 같은 ‘봉(峯)’은 봉우리를 뜻하는 말이며, 지미봉·고내봉의 ‘봉(烽)’은 봉수대가 설치됐던 오름의 한자 표기다. 한편 성판악·수악 같은 ‘악’은 일제강점기 지도 제작을 위해 사용한 오름의 한자 표기다. 이밖에 노꼬메·물장올·감은이 등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한다.
오름 중에는 분화구가 있는 오름과 없는 오름이 있다. 분화구가 한 개인 오름, 여러 개인 오름도 있다. 어승생도 오름이다. 일제강점기 ‘악’ 자를 얻어 현재는 어승생악이라고 불린다. 어승생에는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겨울에 빙판을 이루는 분화구가 있다.
제주도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하여 용암이 터져나왔거나 터지지 못해 부풀어오른 둥글고 봉긋한 것들이 별처럼 뿌려진 모양일 테다.

산·뫼·봉·악·메·동·산·올·오름
어승생은 그 수많은 오름 중 가장 큰 몸체를 지닌 한라산 서북쪽의 오름으로, 한라산국립공원 안에 있다. 한라산 등반 서북쪽 코스인 어리목 탐방로의 출발지점인 어리목광장을 시작점으로 하는 또 하나의 탐방 코스다. 표고(해발) 1,169미터, 폭 2킬로미터에 비고(오름의 높이)는 350미터에 달한다. 어승생은 평지가 아니다. 오름이기에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마냥 평평한 길을 걸을 때와는 다르다. 그러나 분명 등반이나 등산은 아니다. 걷기 좋게 깔린 나무판자와 간간이 나타나는 아기자기한 흙길은 때로는 숲 터널을 만나고 때로는 환한 조각 빛을 받는 오솔길을 펼쳐놓는다. 어른 걸음으로 느릿느릿 놀면서 걸어가도 30~40분이면 어느덧 오름 위에 도달한다. 아쉬운 생각마저 드는 거리다.

화산섬 제주에 별처럼 뿌려진 오름들의 맹주 ‘어승생’
세상에서 바람 부는 일이 사라져버린 듯, 아늑한 숲길을 걷다 보면 하늘이 가까워진다. 하늘을 조각하는 나뭇가지들과 땅 위의 아름다운 뿌리들, 눈높이의 키 작은 나무들, 무성한 잎을 내며 겨울 숲 속을 초록으로 출렁이는 제주 조릿대에 눈길이 머무른다. 제 힘으로 눈을 털어내며 통통 튕겨져 일어서는 제주 조릿대의 모습에 기꺼이 눈길을 준다면 한없이 충만한 길이 된다.
제주도는 늘푸른 난대성 식물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해발고도가 높은 한라산과 그 자락에서는 난대에서 온대·한대·아고산대에 이르는 다양한 식생을 확인할 수 있다. 한라산자락에 있는 어승생 역시 이런 다양한 식물과 식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생긴 별칭이 ‘작은 한라산’이다.
초입부터 시작되는 빽빽한 개서어나무 군락과 아름다운 주목, 한겨울에도 푸른 꽝꽝나무는 이곳이 제주도 한라산자락임을 실감나게 해준다. 멋진 껍질을 가진 노린재나무와 섬매발톱나무·해송·비목나무·산딸나무·때죽나무·단풍나무·윤노리나무·덜꿩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즐비하다. 제각각의 빛깔과 그림자로 숲길을 풍성하게 만든다.
많은 나무들은 새로운 시절을 준비하며 가을부터 온 힘을 다해 만들어온 겨울눈에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한 시간을 보낸다.
“겨울눈은 여행을 떠나지 못한 씨앗과 같다”고 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작고 단단한 몸을 일구며 그 안에 하나의 우주를 담는다. 꽃과 잎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세상으로 퍼져나가 이 지구상 유일한 에너지의 생산자가 되는 거대한 일이 모두 겨울눈에 담겨 있다.

난대·온대·한대·아고산대 식생을 모두 볼 수 있어
어승생을 걸으며 숱한 나무가 가지마다 내놓은 겨울눈을 들여다본다. 겨울눈은 나무마다 모양과 크기·빛깔, 겨울을 나는 방법까지 모두 다르다. 꽃과 잎을 한 몸에 지닌 겨울눈도 있고, 꽃눈과 잎눈을 따로 내는 나무도 있다. 꽃눈은 꽃이 되고 잎눈은 잎이 된다.
숲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는 수많은 나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수백, 수천 개의 겨울눈을 만들어낸다. 지금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 아니 그러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하고 촘촘하게 자신을 지키고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니 사람의 일이라고 어디 다를까?
겨울나무와 햇살을 즐기며 걷다 보면 서서히 큰키나무보다 작은키나무가 많아지는 아고산대 식생이 나타난다. 곧이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바람이 먼저 정상부에 다다랐음을 알려준다. 깜짝 놀랄 만큼 가까이 다가오는 한라산 등성이와 제주 풍경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게 된다.
맑은 날에는 백록담 화구벽은 물론 멀리 추자도·비양도·우도·성산일출봉과 남해안 일대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한라산 정상 화구벽과 장구목 일대가 시원하게 보인다. 어리목계곡이 선명하게 보여 한라산 정상을 오르지 않고도 한라산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찾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온 우주를 담고 봄을 준비하는 겨울눈을 만나는 일
그러나 한라산을 본다는 것. 여기에 서서 그것을 건너다보는 일일까? 아니면 거기 그쪽에 들어서서 보는 일일까? 한라산에서는 정말로 한라산이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은 어쩌면 그에 비친 나를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면 어승생의 화구호가 내려다보인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발 아래 아흔아홉골을 지나 왼쪽으로는 신제주, 오른쪽으로는 구제주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다시 한번 눈을 들어 좌우를 주욱 훑어보면 여기저기 불룩하게 솟은 도두봉·남짓은오름·민오름·사라봉·별도봉·원당봉 같은 오름과 더 멀리 해안이 누구는 아래위로, 누구는 왼쪽 오른쪽으로 오르고 내리며 온통 부드러운 곡선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한편 정상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구축한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한라산을 마지막 방어진지로 삼아 미군 폭격에 대항하기 위해 이곳에 사격진지인 토치카와 동굴진지를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조천과 제주시·애월·한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 요충지로, 들어가보면 아직도 견고한 상태로 대여섯 명이 서 있을 만한 구조와 넓이다.
당시 일본군은 부근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해 진지를 만들도록 했다. 이제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게된 동굴진지는 이곳이 그야말로 세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전망을 지닌 곳이라는 사실을 슬프게 증명한다.
슬픈 역사마저 머무르게 한 어승생의 아름다움
생전에 1,000 회 이상 한라산과 오름을 오르며 지키는 일을 했던 고 김종철 선생의 집필로 1995년 발간된 <오름나그네>에서 그가 어승생에 대해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을 덧붙인다. 어승생을, 그리고 숨은 숲길을 알리고 조심스레 걷는 일이 그곳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이 지키게 하는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다. 그런데 선생은 글의 마지막 단어에서 행을 바꾸어 썼다. 아마도 편집 과정의 잘못은 아니었던 듯싶다.
“속세를 잊게 하는 계곡미와 보배로운 식생을 아울러 가진 어승생은 그 품자락의 수원(水源)으로 하여 더욱 아껴져야 할 오름이다. 거한 몸집에 범접치 못할 위엄마저 지닌 이 오름에 얼마 전 이상한 소리가 들렸었다. 산꼭대기까지 등산로를 뺀다는 것이다. 한라산 등산이 힘든 관광객을 위한 것이라 하니 번지르르 한 길일 것임에 짐작이 어렵지 않거니와 필경은 어승생을 파멸로 모는 길밖에 안 될 것이다. 지금 그대로도 과분할 정도인 것을 부득부득 기를 쓸 노릇이 아닌 듯싶다. 제발
헛소문들이기를….”
글과 사진·이꽃리 (숲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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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