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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헌법’에 금지한 인사청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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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뇌물을 주고 세금 부과나 인사 문제에 대해 청탁을 하는 관행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도 국세청장을 지낸 인사가 세금 무마를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가 하면, 인사 청탁을 둘러싼 공직 비리는 심심찮게 뉴스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분경(奔競)’이라는 인사 청탁 문제는 고심거리였다. 분경이라는 말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분주히 권세가를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뜻이다. 분경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태조실록>의 총서에는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다”고 하여 조선 건국 후 분경의 관행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분경은 여전히 성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종 원년인 1399년 8월 족중(族中) 3·4촌, 각 절제사(節制使) 및 그 대소군관(大小軍官) 등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관리가 서로 만나는 것을 금하는 교지가 처음 내려졌으며, 1401년(태종 1년) 5월에는 삼군부(三軍府)는 무신가(武臣家), 사헌부는 집정가(執政家)의 분경을 각각 규찰하는 임무가 왕명으로 부여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제도적인 조치가 거듭되던 끝에 1470년(성종 1년) 1월에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었고, 이것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헌법에 분경 조항을 구체적으로 둔 것은 그만큼 분경을 철저히 금지해야 하겠다는 조선 왕조의 의지를 표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국대전>의 ‘형전’ 중 금제(禁制) 조항에는 ‘분경하는 자는 이조·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 이방(吏房)·병방(兵房)의 승지, 사헌부·사간원의 판결사(判決事)의 집에 동성(同姓) 8촌, 이성(異姓)·처친(妻親)의 6촌,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자는 곤장 100대, 유배 3천리에 처한다’고 하여, 분경하는 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규정을 정하였다. 권세 가문에 드나들면서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여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성종실록>에는 1483년(성종 14년) 8월 26일 사헌부 장령(掌令)인 송영(宋瑛)의 처 신씨가 분경죄를 저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송영의 작은아버지 송현수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송영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으나, 성종은 송영을 총애하여 오늘날 검찰의 주요 관직인 사헌부 장령에 임명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계속되었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송영의 처 신씨가 팔촌 오빠인 사헌부 집의(종3품) 홍석보를 찾아가 탄핵을 무마시키고 남편의 관직 임명을 청탁했다. 명백한 분경죄로서, 이 사건을 둘러싼 기록이 <성종실록>에 계속 나올 정도로 분경죄는 당시 정국의 큰 이슈였다. 관리의 처가 인사 청탁에 개입한 첫 사례여서 법 적용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 성종은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장 100대에 처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 청탁 비리는 관료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인사 청탁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헌법인 <경국대전>에 ‘분경 금지’라는 규정을 두었고, 처벌 규정도 엄격하게 정해 두었지만 분경의 관행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법으로 규정하여 관리의 인사 청탁 부정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청렴한 관리의 상징인 청백리(淸白吏)에 대해서는 국가가 최대한의 예우를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인 장리(贓吏)의 자손에 대해서는 영원히 과거 시험 자격을 박탈하는 등 엄격한 처벌을 가하였다. 깨끗한 공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선조들의 법 정신을 음미해볼 만하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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