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여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를 부르며 춘천선을 탄다. 비둘기호나 무궁화호 같은 춘천행 완행열차는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 자리에 무시로 복선전철이 다닌다. 그렇다고 춘천 가는 열차의 낭만까지 영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춘천행 열차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다.
편하고 세련됐지만 차갑고 삭막한 현대의 문물 대신 불편하고 보잘것없지만 인정과 따뜻함이 묻어나던 옛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춘천선을 타는 것만으로도 이미 설렌다. 춘천선을 탈 때, 달걀에 사이다를 챙기고 기타를 튕기던 시절의 추억들을 저도 모르게 하나 둘 슬쩍 들추어낸다. 일상의 온갖 의무를 벗어던지고 하루쯤은 가벼운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춘천선을 타보는 거다.
지하철 7호선 상봉역에서 춘천행 전철을 기다린다. 휴일이면 치기 어린 대학생들의 무리 대신 형형색색의 등산복으로 무장한 중년의 등산객들이 플랫폼을 차지하고 섰다. 그들의 얼굴과 모습이 30~40년 전 청춘의 춘천행 열차를 탔던 젊은 무리들과 오버랩된다. 춘천선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들의 것인 듯하다.

청평역~정상~상천역, 쉬엄쉬엄 5~6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산이라는 뜻의 호명산, 높진 않지만 깊다. 예전이라면 참말이지 어디선가 불현듯 호랑이가 나타날 법도 하다. 걷는 내내 깊은 숲을 만날 수 있는 산이다. 낙엽길을 실컷 밟을 수 있는 호명산은 가을이 특히 좋다. 어디건 쌓인 낙엽더미 덕에 사철 가을빛이 도는 산이다. 질주하듯 빠른 걸음으로는 3~4시간에도 오르내릴 수 있지만 쉬엄쉬엄 놀매쉬매 가면 5~6시간 정도 걸린다. 몸이 경주하러 산에 온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부러 쉬엄쉬엄 걷는다.
호명산 등산 경로는 간단하다. 외길이다. 가평올레길 6-1코스와도 겹친다.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다. 청평역에서 시작해 호명산 정상과 호명호수를 거쳐 상천역으로 내려오는 12킬로미터의 코스다. 혹은 가평올레길을 따라 가평역 방향으로 걷거나 숯뚤봉을 거쳐 쁘띠프랑스로 내려가도 된다. 코스는 단순하지만 길은 다채롭다. 숲의 운치와 산행의 즐거움을 두루 누릴 수 있는 길이다.

호명산 정상까지는 꽤 힘든 경사가 이어진다. 2.7킬로미터의 오르막길은 결코 가볍지 않은 몸집을 보여주며 오르고 또 오르게 한다. 선선한 날의 가을 산행에도 몸은 적당한 땀으로 활기를 띤다. 쉬어가는 김에 나무기둥도 만져보고 풀도 더듬어 본다. 나무도 껴안아 본다. 거친 결을 가진 나무에서 따스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숲은 한시도 쉬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부드러운 흙길은 발길의 위안이다.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기대하던 선물을 받은 듯 고맙기만 하다. 오르고 쉬고 오르고 쉬면서 산길을 걷는다. 운동하듯 적당히 땀을 내며 쾌감도 즐긴다.
3분의 2쯤 오르면 쉬어가기 좋은 전망대도 나온다. 의자도 여럿 놓여 있다. 바위에 걸터앉아 청평호를 내려다보며 점심을 먹어도 좋겠다. 산행이란 오르고 쉬고 먹고 내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일상처럼 똑같은 일의 무한 반복 속에서도 자연 안에서는 지루함이 없다. 매번 산이 보내는 언어와 오르는 사람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상 부근 호명호수는 또 다른 기쁨
오르고 또 올라 도착한 해발 632미터의 호명산 정상. 헬기장을 겸한 호명산 정상부는 다소 휑하다. 정상의 경치만을 기대하며 오르는 동안 산이 내어준 숲과 먼 발치 경치를 무심히 지났다면 허무할 수도 있을 터. 산행의 즐김은 정상 오름이 아니라 가고 오는 길의 무성한 숲에 그 진수가 있다. 정상에 아무 것도 없더라도 충만한 산행을 하려면 오르고 내리는 길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며 숲을 즐길 수 있다면 정상이 휑해도 허무할 일이 없다. 정상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호명산 정상부터 호명호수까지는 능선을 타고 간다. 정상에서 호수까지는 약 3킬로미터의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오목하게 포근한 숲길을 오르내리며 울창한 숲을 느낀다. 가을 숲을 관통하며 산행의 재미를 느낀다. 호명호수를 기대하는 마음이 능선을 걷는 몸까지 가볍게 한다.
걷다 보면 시나브로 호수에 닿는다. 호명산 위로 드러난 호명호수는 사람이 만든 인공 호수다. 산 위의 호수라니 이색적이다.
가을 하늘 위로 뜬 뭉게구름이 의외의 기쁨을 안겨준다.
호수 옆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드러눕는다. 뭉게뭉게 무리를 지어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비로소 산행의 결정판인 ‘쉼’을 맛본다. 콧노래도 부른다. 하늘은 가짜처럼 푸르고 구름도 동화처럼 피었다. 사람이 만든 호수보다 더 좋은 건 자연이 만든 구름이다. 몽실몽실 핀 구름 하나에 나이도 시름도 잠시 잊는다.

다듬지 않은 야생미 넘치는 잣나무 숲
원하는 만큼 한참을 쉬고 나서는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상천역으로 내려가거나 다시 가평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오르는 동안 체력이 다했다면 큰길이 나 있는 호명호수에서 청평터미널이나 가평터미널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호수에서 상천역에 이르는 등산로야말로 호명산 산행의 절정이라고 할 만하다. 호명호수에서 상천역으로 내려가는 길은 원시림에 가까울 정도로 거침없는 숲이다. 나무마다 넝쿨이 엉겨 있어 자연 본래의 기운이 흐르고 다듬지 않은 숲에는 야생미가 넘친다. 옆으로 흐르는 계곡 역시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울창한 숲을 지나고 산행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음을 예감할 즈음 난데없이 아름드리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500미터가 넘는 길 전체가 잣나무 천지다. 가평 하면 잣이라더니 지역의 명품모습 그대로다.
오후의 햇살이 대부분 지고 엷은 볕이 아직 남아있는 잣나무숲은 한 편의 꿈처럼 아련하다. 이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들이 생각나는 그림 같은 장소다. 저절로 사색이 피어오른다. 사람이 없으니 더 호젓하다.
오대산 월정사로 가는 전나무 숲길이나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숲길, 남이섬의 은행나무길과도 비교될 만하지만 호명산의 잣나무 숲은 가지런한 길이 아니다. 사람 손이 다듬지 않은 야생미가 넘친다. 이 숲은 사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혼자만 알고 싶은 장소다. 사람의 손길과 발길을 많이 탄 명소에서 느끼는 감동보다 숨겨진 장소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이 더 짙은 법이다. 그 짙은 감동을 다시 맛보기 위해, 좋은 사람들을 데려와 자랑하기 위해 살짝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 인다.
잣나무 숲길을 빠져나와 평화로운 시골길을 지나면 이내 상천역이다. 내려가는 것은 어차피 오름 뒤의 수순이다. 소설가 김훈 선생의 말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은 늘 비길 수밖에 없다. 어쨌든 결국엔 평지를 만난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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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