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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찬제의 문화이야기] 물 한 모금의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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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태풍 ‘할롱’의 영향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던 며칠 전이었다. 청계천변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별생각 없이 전통시장에 들렀다. 외국 관광객에게도 잘 알려진 그 시장은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TV 맛집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끄는 빈대떡집을 비롯해 순댓집, 떡볶이집 등이 제법 붐볐다.

끈적끈적할 정도로 습도가 높고 불쾌지수도 높던 날이었다. 자연스레 갈증이 일어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막상 그 시장에서는 빙수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다른 메뉴들 사이에 ‘눈꽃빙수’가 들어 있는 집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미 포만한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빙수 한 그릇씩을 비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미안하지만 한 그릇만 주문해도 되겠느냐”며 양해를 구했다. 주문을 받아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이 개운치 않았다. 자리값을 못하는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이윽고 눈꽃빙수가 나왔다. 얼음을 마치 눈꽃처럼 갈아 빙수 위쪽을 수놓은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우리는 눈꽃을 둘이 나누어 먹은 다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연세 지긋하신 주인장께서 계산대에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씀을 건네신다. “빙수는 더위를 식히려고 먹는 것인데, 어찌 그리 급하게 다 드셨나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을수록 시원해질 텐데요.” “아, 예. 저희는 그저 둘이 하나만 주문해서 미안한 마음에, 그만, 급히….”

“그럴 게 뭐 있나요? 우리 가게에 오신 손님들이 저희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시면 그게 우리의 행복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며 주인장은 거듭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배웅하셨다. 그 음성이며 미소 덕분에 장마철 음습한 불쾌지수가 일순간에 은총처럼 증발했다. 감동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식당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분명히 그다지 달가울 리 없는 객이었을 터이다. 수지타산에 크게 도움 되지 않는 우리를 진심으로 환대해 준 그분은 어쩌면 이 전통시장의 자존감을 덕성으로 지키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을 단지 돈푼으로 환산하지 않는 기품 있는 상도(商道)를 실천하여 돈을 좁은 자기 우리 안에 가두지 않고 물처럼 세상에 흐르게 하려는 시장의 덕성 말이다.

겨레의 기억을 정갈한 언어로 형상화했던 작가 황순원의 소설 중에 <물 한 모금>이라는 작품이 있다. 시골 간이역 건너편 초가집 헛간에서 여러 행인들이 비를 피하고 있다. 나그네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근심걱정은 한가지다. 비는 그칠 줄 모르는 데다 한기까지 스며들 뿐만 아니라 주인의 허락도 없이 헛간을 찾아든 시간도 제법 흘렀기에 혹시 주인이 쫓아내면 어쩌나 우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과는 달리 집주인은 따뜻한 차를 들고 나와 제집 헛간에 든 행인들에게 한잔씩 권한다. 그 장면에서 작가는 “단지 그것이 더운 맹물 한 모금인데도, 그러나 그것은 헛간 안의 사람들이나 밖에 무표정한 대로 서 있는 주인이거나 모두 더운 물에 서리는 김 이상의 뜨거운 무슨 김 속에 녹아드는 광경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물 한 모금의 인심이야말로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견지해 온 덕성의 일환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일상에서 느끼기 어려운 그것을 나는 그 눈꽃빙수집에서 감동처럼 절감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외국에 체류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 역시 그 어른의 넉넉한 마음과 미소를 통해 조국의 환대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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