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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130여 년 전 조선사회 생생히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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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흥선대원군(1820~1898년)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 조선은 서양 세력의 침략에 시달렸다.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등 서양 열강과 잇따른 전투가 있었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경험은 흥선대원군에게 국방 강화의 필요성을 다시금 환기시켜 주었다. 전국에 서양과의 화친을 거부하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면서 항전 의지를 굳혔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군사시설의 확충을 도모하는가 하면 전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읍지 편찬과 지도 제작을 지시하였다.

1871년 전국의 읍지 편찬을 명한 흥선대원군은 이듬해인 1872년 3월에서 6월에 걸쳐 전국 각 지방의 지도를 그려 올리게 했는데, 이들 지도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459장의 지도에는 섬·진 등 국방에 관한 내용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각 지방의 특징적 정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30여 년 전 조선 사회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1872년의 지방지도는 오늘날 지도와는 달리 산수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한눈에 아름다운 느낌이며 고을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지도책이 아닌 낱장 지도로서 대축척 대형지도라는 점도 주목된다.

각 지도의 크기는 가로 70~90센티미터, 세로 100~120센티미터 정도로 지역마다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오늘날의 측량 지도와 같이 정확한 지도는 아니지만 지도에 들어간 정보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다. 산과 하천, 도로, 고개, 성곽, 포구, 능원(陵園), 사찰, 서원, 향교, 누정(樓亭), 면리, 역, 점(店), 시장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모습을 자세히 지도에 담았다.

흥선대원군대의 국가정책을 반영하듯 사창(社倉)이 전국에 그려진 것도 흥미롭다. 대원군은 고리대금업으로 전락한 환곡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에 사창 설립을 지시하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여부를 지도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강력하게 추진한 해방(海防)정책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오늘날 부산광역시를 포괄하는 동래부 지도에는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익성(翼城), 옹성(甕城)으로 이루어진 모습과 성을 둘러 세워진 망루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읍성을 중심으로 해안 지역에는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多大鎭) 등의 진영을 그렸으며 북쪽에는 금정산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남쪽의 절영도(絶影島) 근처에는 왜인들과 교역했던 왜관(倭館)이 그려져 있다.

각 지방의 지도에는 다양한 정보들이 나타난다. 읍성 안의 관아 배치, 산과 하천, 도로, 시장, 고적, 봉수(烽燧) 등은 거의 모든 고을에 표시되어 있으며 왕이나 왕자녀의 태(胎)를 봉안한 태실, 기록물을 보관한 사고(史庫), 의로운 소와 개의 무덤인 의우총(義牛塚)과 의구총(義狗塚) 등은 연고 지역에 표시되어 있다.

각 지역 관아 뒤편에는 둥근 형태 또는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형태 등 각기 다른 모습을 한 감옥을 그려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

지도의 색채 또한 아름답다.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한 천연 물감으로 그려서 색채가 선명하고 변색되지 않는 장점이 있어서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459개 각 지방의 모습이 담긴 1872년 지도를 통해 140여 년 전 이 땅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것도 큰 수확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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