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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찬제의 문화이야기]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가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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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1939∼2008)의 소설 <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에서 주인공 무소작 씨는 고향 참나뭇골을 떠나 오랜 세월 세상천지를 주유하다가 다시 고향길을 찾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고, 산길이었다. 그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는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세월의 풍상으로 변화된 산천으로 인해 길이 확실치 않다. 반대쪽에서 오던 사내에게 이 길이 맞는지를 묻는다. 그러니까 사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거 오다 보니 산길이 꽤 멀던데 걸음을 좀 서둘러 가 보시오. 조금 전에 그쪽 길로 노형을 앞서간 사람을 보았으니, 부지런히 쫓아가면 서로 길동무를 삼아 갈 수 있을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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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선행자의 행로를 들은 무소작 씨는 불안이 가시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차가운 눈발까지 분분한 이 적막스러운 산길에 사내가 그 선행자의 행로를 일러준 것이 그의 발길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구불구불 골짜기와 산비탈이 연이어진 이 길의 행로 중엔 그 노송숲 외에도 ‘도깨비 씨름판’이며 ‘도둑놈골’, ‘여우바위’를 지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길목이 여러 곳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런데 이내 무소작 씨는 예전 고향 사람들의 말법을 떠올린다. 옛날 참나뭇골 사람들은 이 길을 지나다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좀전에 한 사람이 길을 앞서가더라”고 서로간에 짐짓 선행자를 일러주는 게 예사랬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으스스한 행로에 앞 사람을 좇다 보면 생기는 마음의 위안을 주기 위해서다. ‘도깨비 씨름판’이며 ‘도둑놈골’, ‘여우바위’ 따위가 환기하는 것처럼 밤 산길은 온갖 불안 신호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불안의 신호들은 자유롭고 평화로워야 할 인간의 영혼이나 넉넉한 자연상태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참나뭇골 사람들이 전하는 이 메시지의 진위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말 건넴의 마음바탕이며 소통효과이다. 마음바탕이라면 곧 자애와 평화의 심성일 터이다. 효과 또한 상당하다. 불안한 밤 산길 독행자로 하여금 위안과 용기를 지니게 해 그 말을 듣기 전보다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청준은 현실에서 고단한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위로의 말을 진실하게 전하기 위해 평생 소설 외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그는 쫓겨나듯 고향을 떠나왔지만, 그 누구보다도 고향을 그리워했으며 고향의 정서를 형상화하려 했다. 그는 한편으로 가장 지성적인 소설을 썼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장 고향적인 감수성의 소설도 썼다. 한가위를 앞두고 문을 연 ‘이청준 김선두의 고향읽기’ 전에서 우리는 거듭 그윽한 고향의 풍경을 느낀다. 밤 산길 독행자에게 선행자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던 고향의 마음을 담기 위해 김선두는 환한 보름달 하나를 크게 그려넣었다.

아래쪽으로 어두운 밤 산길이지만, 그래도 위쪽의 둥근 달을 바라보며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기를 바랐을 터이다. 작가 이청준도 그랬지만, 화가 김선두도 참으로 고향처럼 넉넉하고 깊은 품성을 지닌 예술가로 보인다. 요즘 같은 거친 경쟁사회에서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뾰족한가.

남을 보살필 따스한 말마디 준비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가난하며, 어두운 길을 가는 남에게 나누어줄 우리의 빛은 얼마나 비루한가.

고향에서 직접 보았던 보름달보다 김선두의 그림에 재현된 보름달에서 더 깊은 위안을 얻었다. 당분간 그 달빛과 교감하면서 칠흑 같은 밤산길일지라도 홀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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