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단풍이 산허리까지 내려앉아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낼 즈음 들녘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추수가 끝나면 농촌의 읍면 단위로 벼 수매를 시작한다. 지역에 따라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개 10월 초에서 11월 말까지 공공비축용 벼 매입에 들어가는 것이다.
농민들은 정부의 추곡 수매량에 따라, 그리고 특등품·1등품·2등품 같은 등급에 따라 울다 웃다를 반복한다. 논에서 갓 추수한 그대로인 산물벼, 추수한 벼를 햇빛이나 건조기에서 말린 건조벼(톤백벼), 공공비축을 위해 자루에 담은 포대벼 같은 여러 형태로 양곡(糧穀) 수매가 이루어진다. 수매한 벼는 곳곳의 정부양곡 보관창고로 옮겨진다. 정부에서는 1970년대 이후 전국 각 지역에 양곡 보관창고를 많이 지었다.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의 공고 ‘양곡 보관창고’ 편(동아일보 1974년 6월 5일)을 보자. “정부관리 양곡 보관창고 건설신청”이라는 헤드라인에 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했다. 세계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미를 전량 혼합곡(混合穀)으로만 방출하여 가일층(加一層)의 절미(節米)와 그 소비절약에서 얻어지는 쌀은 여유 있게 사전 비축하기” 위해 창고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1975년까지 980동의 양곡 보관창고를 건설하기로 했으니 희망자는 신청하라는 내용이다. 이 창고들에 한해 보관료를 정부의 당시 최고 보관료보다 20퍼센트 더 지급한다고 했으니 신청자들이 몰렸으리라. 1974년에 이미 충남 53동, 전북 95동, 전남 145동, 경북 81동, 경남 116동 해서 모두 490동의 양곡 보관창고를 건립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예로부터 곡물을 보관하는 곳을 창(倉), 병기나 보물 같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을 고(庫)라고 했다. 예를 들어, 지하철 6호선의 광흥창(廣興倉)역은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을 곡물로 보관했던 곳이었고, 중앙선 서빙고(西氷庫)역은 조선 초기에 보물 취급을 받았던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어쨌든 창고에 보관하는 정부미는 비상용으로 쓰일 사전 조치의 쌀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렇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양곡 보관창고의 인기도 달라졌다.
“양곡 보관창고 1978년 천동 건립”(동아일보 1977년 10월 15일)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10여 년 만에 “정부양곡 보관창고 수지 안맞아 사양길. 한해 100~300여 동(棟) 휴·폐업”(매일경제 1989년 4월 3일)이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시골의 골칫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2013년 6월 개관한 전북 완주의 삼례양곡창고가 삼례문화예술촌 ‘삼삼예예미미’로 탈바꿈한 것은 세간의 주목을 끈 놀라운 변신사례다.
등록문화재 제580호인 삼례양곡창고는 192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창고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쌀 보관창고로 쓰였다. 호남평야 쌀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증거물인 셈이다. 이 창고를 책박물관이나 갤러리 같은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해 한 해 수만여 명이 찾는 예술촌으로 바꿨으니, 죽어가는 양곡 보관창고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셈이다.
“나라의 쌀독이 차야 나라가 잘산다”는 속담이 있다. 나라가 잘되려면 무엇보다 식량 사정이 좋아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과 식량자급률 증대는 식량안보 측면에서 농업·농촌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이밖에 적절한 재고관리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문제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양곡 보관창고들! 화재 예방, 침수 피해, 안전사고 같은 전반적인 시설관리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양곡 보관창고에 대해서는 삼례양곡창고처럼 새롭고도 창의적인 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글·김병희(한국PR학회 회장·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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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