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귀 기울이면 사그락사그락 꽃피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계절, 봄이다. 한글 전용으로 어느덧 한자(漢字)가 낯설게 된 젊은 층은 거의 모르는 말이 되었지만 적어도 60대 이상이라면 ‘화란춘성(花爛春盛) 만화방창(萬化方暢)’을 기억할 것이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 매여 무리 지어 핀 꽃들이 손짓하는 산으로 들로 한달음에 달려갈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에게 연민마저 느껴진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 한창인 것이 ‘화란춘성’이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만물이 화육(化育)의 계절을 맞아 다투어 번창하는 것이 ‘만화방창’이다. 봄날의 생기와 자태를 이처럼 겨우 여덟 글자로 곡진하게 그려낸 문구도 드물 것이다. 우주에 관한 감각이 남달랐을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天體)’를 지구라 했고 ‘찰나의 순간’이 인간의 한평생이라고 했다. 아하! 칼 세이건은 자기보다 1233년 앞서 난 이백(李白)과 어찌 그리 닮았을까?
이백이 지은 천하의 명문(名文) ‘봄밤에 복사꽃 배꽃 핀 동산에서 주연을 벌이며(春夜宴桃李園序)’의 내용이다.
하늘과 땅은 만물의 여관이고 사람의 생애는 영원한 시간을 스치듯 지나가는 길손이다. 덧없는 삶은 한바탕 꿈일진대 그중에 진정 즐거운 시간은 얼마나 될까? 진(晉)나라 사령운(謝靈運)이 밤 시간이 아까워 부하들에게 횃불을 들고 늘어서게 해놓고 산간의 밤경치를 즐겼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것 때문에 반란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하물며 따스한 봄날의 아지랑이 낀 풍경이 나를 부르고 봄을 맞은 대자연의 온갖 아름다운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이를 즐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밤이 이슥하도록 옥으로 장식한 대자리를 깔고 꽃그늘에 둘러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밝은 달빛 아래 취토록 마시고 볼 일이다. 이럴 때 시가 아니면 무엇으로 이 흥겨운 기분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저 천하제일의 거부(巨富) 석숭(石崇)이 금곡원(金谷園)에서 그랬던 것처럼 벌주 세 되를 마셔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리라…….
밝은 달, 향기로운 술, 주당(酒黨), 봄꽃,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안 되겠지만 복사꽃, 배꽃 같은 봄꽃이 없다면 달은 빛을, 술은 맛을 단박에 잃을 것이고 주당은 아무 데나 실례하는 주정뱅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꽃은 여름에도 그리고 가을에도 핀다. 그러나 긴긴 혹한을 이기고 피는 봄꽃이야말로 꽃 중의 꽃이 아니겠는가? 마치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른 위인처럼 말이다. 조선 후기 시인 조구명(趙龜命)은 ‘눈 내린 뒤 뜬 달(雪後得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아쉬워하지
世人每恨月與花(세인매한월여화)
피었던 꽃 떨어지고 보름달 이지러짐을
花不常開月有缺(화불상개월유결)
꽃과 달이 언제나 그 모습이라면
若使花月眞長在(약사화월진장재)
꽃과 달의 귀함도 모를 거면서
人情却不貴花月(인정각불귀화월)
꽃이 늘 피어 있고 달이 늘 밝게 떠 있다면 비록 천하달 순 없어도 귀하달 건 못 된다. 그러나 진정 꽃과 달을 아름답고 유의미한 존재로 만드는 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의 혼과 정감이 녹아 들어가야 꽃은 비로소 우리를 향해 미소 짓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惟人最貴)고 했던 것이 아닐까.
유병례 | 성신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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