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김현수와 박병호, 권광민. 꿈을 찾아 미국 무대에 도전한 야구선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은 또 있다. 그들 모두 나의 고객이다.
미국에서 야구는 ‘국민 오락(National Pastime)’으로 불린다. 야구는 오랫동안 미국의 고유문화로 자리 잡았고, 미국인의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숨기고 싶은 치부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다.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된 뒤에도 백인 남성이 아니면 미국 야구계의 주류가 되기 힘들었다. 지금도 팀 운영진과 감독은 백인 남성 일색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해마다 인종-성별 다변화를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진전이 없다.
에이전트 업계는 더 심하다. 주요 야구 에이전시의 대표들은 하나같이 백인 남성이다. 현재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에 등록된 공식 에이전트 중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중 한 명이 2016년에 MLBPA 공인 에이전트가 된 나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던 셈이다.
사실 그 전부터 내 인생은 무모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고교 졸업 후 혼자 미국으로 가 대학을 졸업했고, 그 직후에 교육 사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꿈이었던 방송을 하고 싶어 무작정 프로듀서들에게 내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영어 방송 진행자와 리포터, 라디오 DJ로 살아봤다. ‘좌충우돌’로 열심히 살다가 야구선수들을 알게 됐다. 운동에만 전념하며 살아온 그들은 간단한 서류 작성부터 세무 신고까지, 일상에서 많은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들을 돕는 일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니 ‘진짜 에이전트’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편견과 싸워야 했고, 전례가 없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각종 법률과 야구 규약 등 규정을 꼼꼼히 숙지해야 했고, 협상 능력과 미디어 대처법을 배워야 했다. 에이전트의 결정이 한 선수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기본부터 밟아가기로 했다. 선수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나갔다. 장갑, 배트, 신발 등 선수의 취향을 고려해 하나하나 챙겼다. 기존 에이전시 계약의 관례도 깼다. 몇 년 전 문제가 된 연예인의 ‘노예 계약’처럼, 야구선수들도 터무니없는 장기 계약에 묶여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계약 기간을 1년 단위로 바꾸고, 언제라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권리를 선수에게 줬다. 국내외 야구 관계자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매일 야구장을 찾았고,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흐르고,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선수들의 신뢰가 조금씩 느껴졌다. 국내외 야구인들로부터도 신뢰할 수 있는 매니저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느리긴 해도 회사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현재 리코스포츠에이전시는 야구, 축구, 골프, 리듬체조 등 60여 명의 선수를 고객으로 모시는 회사가 됐다.
지금은 한국 최초의 여성 야구 에이전트로 이름도 조금 알려졌다. 하지만 나는 ‘여성 에이전트’가 아닌 그냥 ‘에이전트’가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성별에 대한 편견과 장벽이 남아 있다면, 나의 실력과 전문성으로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계약한 선수들과 국내외 야구인들이 나를 한 명의 에이전트로 존중하는 모습에서 이미 그 벽은 허물어졌음을 느낀다.
에이전트는 참 매력적인 일이다. 에이전트가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선수는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자기 기량을 마음껏 펼치며 운동에 전념할 수 있다. 그들의 도전이 곧 나의 도전이다. 그들의 꿈과 더불어 나와 내 회사도 함께 성장하면서 즐거운 도전을 계속해보려 한다.
이예랑 | (주)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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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