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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요가를 시작했다. 봄에는 원래 뭐든 해보는 거니까. 몸이 원체 뻣뻣해서 걱정이 되긴 했다. 나도 나지만, 선생님이 너무 당황스러워할까 봐서다. 아니나 다를까, 첫 수업 마치자 슬며시 다가와 조심스레 물으신다.


“혹시 어디 크게 다치신 적 있나요?”


나는 싹싹하게 “아니요”라고 답한다. 이런 질문, 이제는 그냥 조금 웃음이 난다. 헬스든 요가든 태극권이든, 한두 번 수업을 하고 나면 지도 강사며 동료 수강생이 연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몸의 이력을 묻는다. 언제 크게 다치셨나 보군요?


나도 안다. 이것은 적어도 호의에 기반을 둔 관심이다. 인간이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분류하면, 연민심의 위치는 분명 긍정적인 범주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고백하면, 나는 이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기분이 그 바람에 조금 울적해진다. 속으로는 자존심이 슬쩍 상하고, 겉으로는 연민의 시선에 호응하듯 슬픈 표정이 배어나온다. 동작 하나 시원시원하게 해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만족감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게 소위 ‘자격지심’이라는 걸까. 이런 궁금증도 꼬리를 문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불행 그 자체일까, 아니면 자신의 불행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일까.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밀어드렸더니, 할머니가 리어카를 세우고 노기등등한 퀭한 눈으로 역정을 내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할머니는 두 팔을 있는 대로 휘저으며 컴컴한 밤하늘에 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가! 가! 가! 가!


얘기가 좀 샜다. 사고 한 번 당한 적 없건만 디스크라도 한 번 지나간 듯한 출력을 내는 몸뚱이 덕분에, 나는 이런저런 인생 공부를 한다. 거기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는 걸로 안 보이는 차원이 있다는 교훈도 얻는다. 이런 얘기는 좀 낯간지럽지만, 그럭저럭 모범생 대열에서 턱걸이 정도는 하며 나는 학창 시절을 통과했다. 조금 힘써서 노력하면 남의 눈에 두드러지게 되고, 으레 칭찬과 격려가 뒤따르는 일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졌다. 인생이란 으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내가 누군가를 그런 생각으로 바라봤을 때, 그 누군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펴지지 않는 오금을 붙잡고 뼛속까지 통증을 느끼는 내 뒤통수 너머로, 이런 말이 들렸을 때처럼. “그렇게 대충 하시면 안 됩니다. 무릎을 반듯하게 펴셔야 효과가 있어요.” 그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 경험치가 알량했다.


 오금이란 무릎 뒤편의 오목하게 들어간 안쪽 부분이다. 경추며 어깨며 고관절이며, 뒤틀리고 오그라든 부위가 한두 군데는 아니지만, 나의 가장 오랜 고민거리는 펴지지 않는 오금이다. 무슨 사연인지, 나의 오금은 몸이 말랑말랑한 새순 같아야 할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에 바짝 그을린 ‘쫀디기’처럼 뻣뻣하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서서 상체를 아래로 굽혔을 때, 손끝은 아무리 용을 써도 무릎과 복사뼈 사이만 맴돌았다. 땅바닥을 스치지도 못했다. 나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몇 차례 내 등짝을 힘껏 눌러보더니 들릴 듯 말듯 혼잣말을 하셨다. “거참, 무슨 애가….”


그런 오금을 가진 채 나는 성장했다. 움츠러진 오금은 균형을 잡기 위해 고관절을 비틀었고, 이어 요추와 흉추, 턱관절까지 건드렸다. 뒷목에서 등줄기를 거쳐 발목으로 이어지는 인체 뒤쪽 라인이 순환되지 못하고 야금야금 돌덩이처럼 굳어갔다. 급기야 무릎 뒤 오금으로부터는 먼먼 별세계라서 영향이 있을까 싶은 어깨와 뒷목에서 기별이 왔다. 흡사 불꽃이 튀듯, 눌린 신경조직이 찌르르 스파크를 일으켰다. 간략하게 쓴 내 몸의 이력서다. 나는 요즘도 궁금하다. 어떻게 된 애가 초딩 시절부터 그렇게 오금이 저렸을까. 숫제 오금이 저린 채로 태어난 걸까. 무얼 보고 그렇게 온몸이 오그라들게 겁을 먹었을까. 사는 게 다 무서웠을까.


나는 매일 아침 죽을 동 살 동 온몸에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며(기분이 그렇다는 얘기다) 외롭게 분투한다. 고작 이 정도 자세를 취하느라 내가 속으로 죽음의 늪을 건너는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나도 조금 웃는다. 나의 요가는 이렇게 점점 외로워지고 내면적이 되어간다. 나만 아는 성취와 나만 아는 고비와 나만 아는 기쁨 속에서, 나의 요가는(어쩌면 고독은) 단련되어간다.

 

김진경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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