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쓸데없는 감정 소모 같은 걸 하진 않겠죠?”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는 채근하듯 물었다. 뭐라 답하겠는가? 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어깨를 한번 가볍게 들썩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요. ‘쿨’하게, 노련하게, 약간은 프로(?)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안도한 듯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첫 키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녀의 입에서 ‘감정 소모’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이미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 이 여자는 내가 하려는 숭고한 사랑이란 걸 기껏 감정 소모쯤으로 여기는구나. 거친 돌멩이 같은 게 가슴 위로 쿵 떨어졌다. 쿵, 쿵, 쿵, 쿵. 슬프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내 몸을 들어 통째로 쓰레기통에 거꾸로 쳐 박는 듯한 무심한 잔인함이 그 말에는 있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했다. 책가방과 아침밥과 버스 토큰과 모의고사와 진학 상담, 부모님의 잔소리, 친구들과의 잡담 같은 일상의 공간들에 그녀의 얼굴이, 목소리가 맥락도 없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균열의 증거였다. 견고해 보이던 일상의 틈새로 감정은 끊임없이 새나왔고, 이내 흘러넘쳤다. 나는 버둥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해 출렁였다. 때로는 밤새.
연애라는 건 웃기는 구석이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동업관계면서, 묘한 경쟁관계에 놓인다. 서로 제 마음은 덜 주려고 하고, 상대의 마음은 더 갖고자 하는 경쟁이다. 물론 그래 가지고는 동업이고 뭐고 잘될 턱이 없다. 사업은 좌초될 것이고, 둘 다 풀 죽은 패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 마음이 상한 것이다. 속이 꼬인 거다. 나도 그랬다. 약이 오르고 속이 상했다. 감정 소모라니, 사람 마음을 그딴 식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주겠어. 그런 생각으로 몇 날 며칠 끙끙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돌려세울 만한 뾰족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기화되는 얼음 조각처럼, 내 감정은 목적지를 잃고 하릴없이 소모되었다.
“감정 소모를 줄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긴 세월이 흘러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그녀가 과거에 했던 말―쓸데없는 감정 소모―이 오버랩되어 헛웃음이 나왔던가. 상당한 시차가 나긴 하지만, 그녀와 나는 결국 같은 지점에 서 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 내가 이 말을 이겨보려고 얼마나 끙끙댔는데…. 이긴 것은 그녀인가. 하지만 입으로는 이런 말이 무심히 이어졌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낭비가 심하잖아.”
술 탓이었을 거다. 그 전까지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심리상담가 친구가 버럭 화를 낸 것은.
“야, 그렇게 해서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그래? 바보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우리가 사는 목적인 거야. 그걸 위해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자식도 낳고 그러는 거야. 너는 왜 그걸 낭비고 소모라고 부르냐?”
친구는 열을 올렸지만, 그 말은 별로 와닿지 않았다. 팔자가 한가하니, 이런 소리가 나온다. 그런 마음만 들었다.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서 매순간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결과물을 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우리 삶을 보라. 얼마나 빈틈없이 알뜰하게 디자인되어 있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소모’라는 이름의 틈새를 메우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하지만 무슨 생각의 발효였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긴 길의 끝에서, 친구의 말은 물음표로 바뀌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그럼 너는 뭐 때문에 사는데? 산다는 게 다 뭔데?
우리는 뭔가 도드라지거나 쓸모 있는 결과물을 내지 못한 행위를 가리켜 흔히 ‘소모적’이라고 표현한다. 속앓이하던 그 밤에 영어 단어나 외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답도 없는 질문에 치어 밤새 비운 술잔은 얼마나 많았던가, 고작 아이 장난감 하나 구하자고 동네방네를 헤매다니, 빤한 연속극에 빠져 시간 낭비를 하다니 무슨 짓인가, 식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 소모된 시간들을 용서하고 싶다. 이제는 전생처럼 까마득해져버린, 기억 속의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어이, 우리는 소모된 게 아니야. 경험했을 뿐이야. 그게 삶이잖아. 그러려고 사는 거잖아.
모든 것은 지나간다. 우리에게 남는 건 경험뿐이다. 그녀가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그라미를 그려주면 좋겠다.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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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