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한을 쳐들어왔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 살로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12월 8일 서울 시민 중 만 19세 이상 되는 청년은 모두 징집에 응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2주 만에 입대를 결심했다.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입영통지서를 확인한 후 창덕궁 앞마당 집합 대기 행렬에 몸을 맡겼다.
나는 이왕이면 최전방에서 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더욱더 애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부후보생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항간에 전방에 배치되자마자 전사하는 장교들이 많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두렵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전방에서 병사를 지휘하다 전사한다면 군인으로서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 제5사단으로 배치되어 충북 제천, 단양 등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사단장은 "전쟁터에 배치된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아니 그 이상 북진해 적군을 물리쳐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각자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 비겁한 장교가 되지 마라!"고 훈시했다. 가슴속에 이 말을 깊이 새겼다.
곧바로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치열한 전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북한군이 내려오는 길목에 1개 분대를 매복해 합동으로 공격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7명의 부대원 중 5명에게는 소총수의 임무를 맡기고, 나머지 2명에게 수류탄 두 발씩을 준비시켜 매복해 있다 분대 앞을 지나는 북한군을 보자마자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터뜨려 괴멸시켰다. 우리는 단 한 명의 희생자 없이 승리하고 소대로 복귀했다. 우리 부대는 계속 큰 전과를 올리면서 강원도 오대산을 지나 간성 건봉령까지 위풍당당하게 전진했다.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 나는 나라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군에서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등의 과정을 병사들에게 지도하다가 1959년 3월 31일 예편했다. 나는 전쟁 중 두 차례나 크게 부상해 전상군경이 됐다. 그때의 부상은 평생의 고통으로 나를 괴롭혔지만, 젊은 날 나라를 지키다 생긴 영광의 상처를 훈장처럼 여기며 이날까지 살아왔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 발전을 이룩한 모습을 마주할 때면 문득문득 가슴이 벅차오른다. 식민 지배와 전쟁, 절대 빈곤을 단기간에 극복하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모습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또한 국가와 가족을 위해 한평생 헌신한 나의 삶 역시 한없이 자랑스럽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전쟁 당시 피 흘리며 쓰러져간 무수한 청년들이 얼마나 간절히 꿈꾸던 삶이이었던가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또한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중심 잡힌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우리는 오늘날 번영된 대한민국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과 국가유공자의 헌신을 바탕으로 이룩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격동의 세월을 국가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고귀한 정신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여생을 국가유공자로서 명예를 지키고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며 살아갈 것이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

글 · 김영환 (전상군경(6·25 참전유공자))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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